한국일보

끝나지 않은 위안부 이야기

2017-08-25 (금) 홍성애/뉴욕주 법정통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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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뉴스에서 서울시내 51번 버스 노선에 위안부 동상을 한 승객좌석에 태우고 다니는 영상을 보았다. 일반 시민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좀 더 가깝게 접하기 위해 수십개의 동상 복사본을 그 노선에 매일 태우고 있다고 했다. 한국인이나 외국인들이나 그걸 만져보기도 하고 안내문을 읽으며 아주 반응이 좋다고 한다. 막연하게 알던 것을 눈앞의 동상을 봄으로써 좀 더 실체적으로 분명하게 느끼게 됐을 것이다.

어둠속에 가려져 있던 위안부 실상을 밝은 빛으로 끌어낸 여인이 있다. 전 이화여대 영문과 윤정옥 교수로,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조사를 1980년에 시작했다. 자신이 이화여전 1학년 시절 “처녀 공출”이라는 정신대연행에 대한 공포는 그 연령대의 여자들에겐 피치 못할 현실로 다가왔다. 부모들은 부랴부랴 학교를 자퇴시키고 결혼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버지 윤성렬 목사의 권유로 결혼한다는 거짓 핑계를 대고 자퇴해 금강산 온정리로 피신했다. 그 때부터 그녀의 뇌리엔 끌려간 여자애들에 대한 죄책감이 따랐다. 해방이 되고 징병 갔던 남자들이 서울역에 내렸을 때 윤 교수는 거기 나가 그들에게 물었다. 정신대로 붙잡혀 갔던 여자들은 왜 안 보이냐고. 그 말에 모두 못 들은 척 가버리는데 한 남자가 “그 위안부들 말이요?’ 했다. 이때 처음으로 위안부란 말을 듣고 그 실체를 알게 됐다. 아, 그랬구나! 이들은 종군위안부로 징용 당했었구나 하고.


윤 교수는 7.17정전협정후, 목사 자녀들에게 미국감리교단에서 베푼 전액 장학금을 받아 미국유학길에 올랐고 귀국해 모교인 이화여대교수로 30년간 봉직하다 은퇴했다. 은퇴후 윤 교수생활은 오로지 정신대 문제에 몰두하게 되고 맹렬한 활동이 개시된다. 자비를 들여 위안부 생존자가 있다는 곳엔 국내외를 불문하고 찾아다녔다. 그리고 생존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었고 그 내용을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다.

첫번째 만난 피해자는 1980년 11월 일본 오끼나와에 사탕수수밭 오두막에 혼자 칩거하고 있던 배봉기 할머니다. 할머니는 끈질긴 권유에 3번째에야 문을 열어줬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정신대 문제에 더욱 가속이 붙고 1991년 최초로 위안부 증언자 김학순 할머나가 언론에 등장한다. 이를 효시로 정신대 문제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인 이목을 끄는 이슈가 되었다.
종군 위안부 문제는 가부장적 풍토(아들을 징병면제해 주는 대신 딸을 정신대로 보내는), 위계질서 가운데 일본 군국주의의 천인공노할 인륜을 깡그리 말살한 제도적인 성 착취요, 인간성 말살의 행위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진심어린 사과를 안했다. 윤 교수는 2015년 아베정권과 타결한 10억 배상에 더 이상 이 문제제기는 않기로 한 것은 철천지 한이 맺힌 생존자들과는 일언반구 의논도 없이 이루어진 졸속 딜이라고 몹시 분노하셨다.

그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건, 몇 푼의 보상금이 아니라 어린처녀로서 감당할 수 없는 짓을 강요당한 수치와 울분, 일생 아물지 않는 정신적인 피해에 대한 진정어린 일본정부의 심심한 사과라고.

윤 교수는 나의 어머니 둘째 여동생으로 존경하는 이모님이시다. 정의를 위해, 절절이 한이 맺힌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할머니들 다 돌아가셔도 내가 끝까지 할 거야” 라고 외치는 일생 독신의 꼬장꼬장한 분이다.

이제 90이 넘으신 이모의 소원대로 그 분들의 한이 속 시원히 풀리는 걸 볼 세상이 꼭 왔으면 좋겠다. 일본은 세계경제대국의 일등국가로뿐만 아니라 사리에 합당한 사과도 할 줄 아는 성숙한 도덕수준의 선진국으로 거듭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연로한 생존자 할머니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홍성애/뉴욕주 법정통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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