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금,여기,오늘

2017-01-27 (금) 최동선/전 커네티컷한인회장
크게 작게

▶ 커네티컷 칼럼

겨울이라고 하지만 창가에 머무는 빛의 온기는 봄이라 불러도 좋을 듯한 날이다. 그런데 빛이 시간과 비례하여 서서히 각도를 달리 하더니 어느새 모양마저 변해 버렸다. 내일은 눈이 올 거라고 예보하는 라디오 속 여자아나운서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눈이 오면 좋고 눈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변화를 바라보고 생각을 걸러 내며 오랜만에 익숙한 거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창밖의 거리는 여느 해의 겨울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짙은 감청색 자켓에 회색 면바지를 입은 구부정한 노인이 마트에서 걸어 나왔다. 오랫동안 세탁을 안했는지 낡은 소매 깃이 반질반질 윤이 났다. 잠시 멈춰 서서 허리를 고쳐 세워 보지만 세월의 무게는 속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마치 흑백 영화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깊게 패인 주름진 얼굴을 들어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를 찾고 있었다. 노인의 손끝에 매달린 하얀 비닐봉지만이 패잔병의 깃발처럼 나부꼈다.

노인이 이제 막 나온 식품점을 나도 들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통로였는데 간이 진열대까지 내어 놓고 물건을 쌓아 두어 더 비좁게 느껴졌다. 다양한 상품을 눈에 띄는 곳에 진열하여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한 상혼이겠지만 손님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에 잠깐 피로를 느꼈다. 특별히 살 것을 찾지 못한 채 건성으로 둘러보다 코너에 수북이 쌓여 있는 감자를 발견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으면 방금 삶은 햇감자를 건네주던 어머니, 그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햇감자를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나도 그 노인처럼 마트를 나섰다. 문 옆으로 비켜 선 사람과 눈인사를 하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마트로 걸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간다. 내 손 끝에는 하얀 비닐봉지가 그리움으로 펄럭인다. 어느 날의 어머니의 기일처럼 하늘의 해는 이미 기울고 겨울이 산을 타고 광장으로 내려와 있었다.

차에 앉아 내가 지나온 광장을 돌아보니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으로 공간이 나뉘었다. 안에 있으면서도 밖을 동경하는 어떤 이의 마음이 유리를 만들어 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단되고 싶으면서도 온전하게 차단되기 싫은 마음,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고 동시에 허무는 그 미묘한 마음을 유리문 안에 가두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새 마음으로 건너온 정유년의 첫 달은 덧칠만을 남겨둔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 익숙한 거리를 낯설게 바라보며 지나는 동안 차에서는 노래 ' 거위의 꿈' 이 흘러나온다. 가사 한 구절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노래를 들을 때 마다 날지 못하는 나와 날고 싶은 나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를 만나곤 한다.

늦은 저녁, 어수선한 나라 안팎의 뉴스를 뒤적거리다 '강수진' 이라는 이름에 눈길이 멈추었다. 오래 전 그녀가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명성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관심 있게 보며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한때 인터넷을 달군 상처투성이의 울퉁불퉁한 발 사진 한 장은 그녀가 어떻게 세계 제일의 자리에 올랐는지 충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 후로 그녀를 떠올리면 아름다운 몸짓이나 화려한 이력보다는 고행을 거듭한 순례자처럼 거칠어진 그녀의 발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몇 해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 국립 발레단을 이끌고 있다는 뉴스였다. 최근 국립 발레단 단장 연임에 성공한 그녀가 발레리나로서의 삶을 내려놓고 행정가로의 '제 2의 인생'을 살게 된 것에 "기쁘게 적응하고 있다." 며 화면에서 활짝 웃는다. 오래된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다가 본,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어딘가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날은 내가 연습을 게을리 했구나." 하고 반성하게 된다는 말에 밑줄을 그어 두기로 한다.

풀을 베는 사람은 들판의 끝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어차피 미래는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 지금 풀을 베고 있다면 풀 베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말이리라. 행복이라는 무지개가 어디 먼 하늘가에 따로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하루라는 고개를 넘는 언덕위에 아름답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러 슬픔이 다녀가고 가끔은 상실의 숲에 갇히더라도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더 낮게 마음을 기울일 일이다.

<최동선/전 커네티컷한인회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