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는 정말 반복되는가

2016-11-08 (화) 한영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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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퇴근한 아들이 귀가하자마자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를 본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최순실 뉴스에 촛점을 맞춘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사무실에서 온통 샤머니즘 시대로 돌아간 한국 얘기란다. 다른 민족의 사람들에게서 이 얘기를 들은 아들은 얼마나 창피했을까.

마케아벨리는 500여 년 전에 ‘오늘에 와서는 밤낮으로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을 보고 있다.’고 썼는데, 요즘도 그때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그때는 사보나롤라라는 자칭 예언자가 나타나 르네상스 정신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전횡을 일삼다가 화형당했다.

하지만 현재도 용한 신기를 지녔다는 최씨 일가가 나라를 쥐락펴락 함부로 흔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해도 현대의 최씨네는 사형을 당할 리도 없고 가난뱅이가 될 리도 없고 얼굴을 못 들고 다닐 리도 없다. 시간만 좀 지나면 여전히 잘 먹고 잘 살 거라는 데 우리의 절망이 있다. 시대가 좋긴 좋아졌다고 할 것이다.


한국에 ‘근자감’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근거 없는 자만심’이란다. 근거가 ‘있다’가 아니라 ‘없다’에 방점이 찍힌다. 근거와는 무관하게 무조건 갖추고 봐야하는 서바이벌 시대의 자만심. 그게 최고의 경쟁력이다보니 자격미달인 사람이 대통령도 되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고위공무원 노릇도 자신만만하고 떳떳하게 대행한다.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포장하라’가 21세기의 새 격언이 될 법도 하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는 유신에 걸려 직장에서 쫓겨났다. KBS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면서 정치적 발언을 함부로 한 게 죄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교복을 입은 채 아버지 구명을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쓸모 없는 짓도 했다. 그게 쓸모 없다는 걸 전혀 몰라서였다. 그러다 깊은 무기력에 사로잡힌 나는 수업을 줄줄이 빼먹으며 졸업을 했다. 진학에도 흥미가 없어서 공부는 손을 놓은 채 소설책만 읽었다. 대학생으로 군대에 갔던 사촌오빠는 의문사를 했고, 대학 학생회장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동생 때문에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기 싫은 때도 있었다.

더 기막힌 세월은 결혼 후에 왔다. 내 아버지는 골수 반정부인데 반해 시아버지는 전두환 시절 골수 친정부였다. 아버지는 시아버지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고, 시아버지는 대면할 수 없는 아버지 대신 나를 구박하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고 미국에 왔지만, 지난 한국 대선 때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박정희 기념사업회도 생기고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자세는 내 이성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아낌없는 찬사를 듣고 있어야 하거나 그에 동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집요와 강요가 참 기막혔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기왕 대를 이어가며 여러 사람 울리면서 하는 일이면 좀 잘이나 하지, 겨우 무당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려고 그 많은 억울한 사람과 기막힌 상황을 만들었단 말인가. 나는 요즘 다시 억울하고 다시 분노한다.

<한영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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