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생마의 꿈

2014-11-1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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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용 / CPA·수필가

청마의 해가 부쩍 깊어졌나 보다. 서머타임이 바뀌는 계절이 되면 유난히 해가 빨리 짧아진다. 쌀쌀한 바람이 주변을 서성이며 구르는 나뭇잎처럼 어딘가로 떠나는 이들에 마음이 쓰인다. 밤새도록 내린 가을비 뒤끝에 찬바람이 내 본능을 자극한다. 핏속에 조용히 돌고 돌던 유전자 속에는 아직도 겨울이 잠자고 있나 보다. 겨우살이 한철을 맞는 남정네의 마음 씀씀이가 초겨울의 그림자만큼이나 길게 드리우는 계절이다.

추수감사절이다, 성탄절이다, 사람 노릇할 일은 많은데 소처럼 말처럼 일하긴 했는데 여기 저기 들리는 소리는 빈 수레소리만 요란하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어려운 시절을 겪어야 좋은 시절에 감사하고 겸손하게 살게 된다고 했던가. 마치 쓴 맛을 알아야 단 맛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 아는 것처럼. 지나온 열 달을 뒤돌아보는 것보다 다가올 두 달을 염려하는 것이 말을 살찌게 할 수도 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고 멀리도 왔다. 멀고 긴 여정이면 코이처럼 자라는 줄 알았다. 어항에서 자라면 겨우 4인치로 자라는 놈이 연못에 풀어 놓으면 준척으로 자라는 신기한 물고기가 바로 코이라고 한다. 코이는 노는 물에 따라 성장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자라서 40인치까지 쑥쑥 크고 강하게 자란다. 피라미가 대어가 되는 신기한 물고기처럼 조국 산천을 안녕하고 기회의 나라에서 달린지도 십수년이 지났다. 코이처럼 길고 먼 강을 헤엄쳐 오르는 꿈속에 오늘도 하루를 지낸다.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화제다. 월급쟁이 직장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어느 새 주인공이 되어간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상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던 시절을 몸으로 겪으며 지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직장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은근한 젊은 남녀의 눈빛 속에 사랑도 담겨 있다. 치열한 생존현장에서 젊음이 녹아나던 시절이 그곳에 보인다. 시간은 모든 사람의 편만은 아니다. 뛰고 넘어지고 일어서는 쟁이들의 애환이 가슴을 울린다.

바둑 격언들이 드라마에 많이 등장한다.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은 격언만 알아도 1급이라고 한다. “남의 집이 커 보이면 바둑은 진다”라는 격언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인간의 억제할 수 없는 탐욕을 다스리는 냉정한 마음자세를 보여준다. 1년 365일 매일이 다르듯이 흑백 돌 361개가 361개의 교착점에서 싸울 때마다 미생마의 생사는 엎치락뒤치락하게 된다. ‘갑’질의 생존게임에서 주인공의 바둑 격언이 반상 위에 빛난다.

미생마는 탐나는 먹잇감이다. 우리는 미생마처럼 수많은 나날들을 움츠리고 살아간다. 건드리면 터져버리는 아픔이 너무나 많다. 행여나 제복의 얼굴들이 ID라도 내밀면 가슴이 철렁한다. 관청에서 서류라도 받아들면 지레 겁부터 먹는다. 신대륙이라고 꿈과 희망이 있다고 왔는데 살찐 늑대들이 우글대고 있다. 사즉생이라고 죽기 살기 싸우다가 안 되면 최선의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36계 피하고 보는 거다.

태풍이 불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공연히 맞서 싸운다고 상 주는 것도 이기는 것도 아니다. 강물에 사는 코이는 적들이 많다. 크고 강해야 이긴다. 본연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사는 거다. 멀리도 달렸다. 9회 말 2사까지 잘 견디고 있다. 한 집만 더하면 완생의 꿈을 이룰 수 있다. 땀에 젖은 얼굴이 거울에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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