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보십시오, 봄입니다

2012-04-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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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입니다. 봄은 숨 쉬는 공기부터 감촉이 다릅니다. 차갑기만 하던 대기가 문득 비단처럼 부드럽고 사랑처럼 감미로워지고 있습니다. 여기 워싱턴주 밴쿠버에는 겨우내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3월 하순부터 그치고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곧잘 햇빛이 비칩니다.
구름 속에서 나타나는 옥색 하늘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하늘에서 내려오는 따뜻하고 밝은 햇빛이 주는 느낌은 겨울의 때묻은 구름 아래에서 찬비를 맞고 지내온 밴쿠버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감격입니다. 4월,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꽃자두 나무의 진분홍 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터져오르는 꽃자두 나무의 개화는 봄의 감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를 나서는 길 어귀에는 겨울 내내 비에 젖어서 온 몸에 이끼를 뒤집어 쓴 늙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2, 3층 높이로 하늘에 솟아 있는 이 나무는 어지럽게 펼친 가지마다 이끼가 걸려 있어 잿빛 겨울 하늘에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동화에나 나오는 마귀의 성에 서 있는 고사목의 형상입니다. 겨울에는 이 나무를 볼 때마다 그 음산한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 음울하고 을씨년스럽게 하였습니다. 저 나무를 차라리 베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 죽은 것 같던 나무의 잔가지가 요즘 자욱한 갈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가지 끝마다에 새 이파리를 내놓을 움이 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늙은 나무의 변화를 보면 봄은 그저 꽃이나 피우며 지나가는 무상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우리 사람들에게도 무엇인가 심각하고 엄숙한 그 무엇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나는가/ 사람들이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하지만 히야신스 정원에서 밤늦게 한 아름 꽃을 들고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빛의 핵심인 침묵을 들여다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엘리어트가 이 시를 발표했던 1922년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났을 때였습니다. 전쟁의 폐허에 찾아 온 4월의 화사한 봄은 시인이 보기에는 너무 잔인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봄은 전쟁의 폐허를 쓸어내고 다시 인간다운 삶을 연출해 내라는 섭리의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그 요청이 아무리 잔인하게 느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야 하는 사람들에게 엘리어트는 진정한 위안의 노래를 쓰고 있었다고 보겠습니다.

봄은 우리 과거의 삶이 아무리 어두웠을지라도 거기서 일어나 새로운 삶의 잎을 피우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실수, 한 때의 객기, 생의 질곡에서 저지른 무거운 죄까지도 겨울이라는 과거에 묻고, 오늘 봄의 아름다운 변화에 따라 새롭게 일어서기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잔인한 요청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어둡고, 춥고, 거칠고, 악한 것일 수도 있음으로 거기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철면피한 행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봄은 잔인할 만큼의 자아극복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일어서지 않으면 징정한 봄을 맞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봄을 내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생애의 꽃을 피워낼 수 있을 때만 봄은 봄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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