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의 데자뷰

2011-12-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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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중순, 월드비전 국제모금회의 참석차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월드비전 내 주요 국가들이 모여 한 해 동안의 경험을 나누고 ‘이 어려운 시기에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어떻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를 토론하는 자리였습니다.

올해는 최근 국제 월드비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월드비전 한국이 초청국가를 맡았고 무려 25개 국가에서 약 200여명의 대표단을 보내, 특히 관심이 컸습니다.

월드비전 출신으로 현재 미국 월드비전에서 근무하고 있는 터라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한한 저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주일의 회의 일정 중 둘째 날 저녁, 모든 참석자들이 한국 월드비전이 해마다 여는 ‘월드비전 후원자의 밤’에 초청되었습니다.


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무작위 선정된 후원자들도 초청돼 함께 축하를 했습니다. 유명 가수 콘서트도 아닌데 3,000여명의 후원자들이 행사장 문이 열리기도 전부터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 감동을 주더니, 행사가 시작돼 후원자들의 어려운 환경 속 사랑 이야기와 후원을 받는 아동들의 영상 감사편지가 전해져 눈시울을 적시게 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25세 방글라데시 청년 제임스였습니다. 몸집은 왜소했지만 눈빛이 맑았던 제임스는 월드비전 친선대사 탤런트 김혜자씨의 과거 후원아동이었습니다. 김혜자님의 월드비전 사랑 경력이 20년이 넘고 꾸준히 유지하는 후원 아동 수가 140명 이상이니, 20여년간의 후원을 받은 아동 수는 훨씬 많겠지요.

제임스는 김혜자님이 월드비전과 처음 연을 맺던 때 후원아동 명단에 포함됐고, 18세가 넘으면서 그 후원이 다른 아이에게로 이양된 사례였습니다. 제임스는 현지 월드비전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늠름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도움을 베풀었던 후원자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았고, 마침 그 후원자가 한국의 유명 배우라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인터넷을 통해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외국인 김혜자 열혈팬의 페이스북에서 김혜자님의 소식을 접하고는 그 팬을 통해 한국 월드비전 및 김혜자님과 극적으로 연락이 닿아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그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맺혀 있었고, 그 감사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뿌듯함으로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토요일, 저는 김혜자님, 그리고 제임스와 점심을 함께 나누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체류하는 며칠 동안 제임스는 방글라데시에서 학업을 마친 후 한국에 유학 오겠다는 계획을 구체화할 수 있었고, 몇몇 대학들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불현듯 데자뷰가 떠올랐습니다. ‘어! 이거 어디서 보았거나, 들은 얘긴데?’ 바로 제가 존경하는 건국대 오성삼 교수님의 40여년 전 이야기였습니다. 외국인 후원자의 도움으로 성장했던 아이, 더 큰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유학해 주경야독 했지만, 더는 여력이 없어서 마지막 학기를 포기할 뻔했던 아이, 월드비전 국제총재 사모님의 개인 후원금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아이, 성공해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7배로 갚겠다고 다짐했던 가슴 속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여년이 지난 후 한국 월드비전의 문을 두드린 아이….


바로 그 오성삼 교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 그 날 김혜자님과 함께 내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공부를 다 마친 후 가난한 내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후원자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입니다.” 제임스가 그 맑은 눈동자로 김혜자님을 바라보며 남긴 말이었습니다.


박 준 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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