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코스모스 피는 인생길

2011-11-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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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활인의 신앙

이제 가을이다.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바람이 피부에 와 닿는 계절이다. 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살 사이로 그리움이 밀려오는 가을을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가 보다.

옛 학창시절, 내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는 가을이면 온통 코스모스 꽃으로 가득 찼다. 그 속에서 우리 모두는 으레 계절병을 앓았다. 드높게 맑은 하늘과 한적하고 넓은 캠퍼스 사이로 뚫린 길가에 가득히 핀 코스모스를 바라보기만 해도 그리움이 밀려오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든 지금에도 가을이면 코스모스 꽃이 만발한 젊은 시절의 캠퍼스가 생각난다. 코스모스가 곱게 핀 그 길을 다시 한 번 걸어보고 싶다.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아름다운 우체부’라는 글이 생각난다. 내용인즉, 평생을 쉬지 않고 우편물을 배달해야 하는 어느 우체부 이야기였다. 특히 그를 지치고 피곤하게 만든 것은 매주 한 번씩 들러야 하는 먼 시골 외딴집의 배달이었다.


길도 포장되지 않은 흙먼지 밭 십여리 시골길을 갔다 오는 날은 온 몸에서 진이 빠지는 느낌으로 심한 짜증이 일었다. 그렇다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에 직장을 그만 둔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그의 착한 아내가 조언을 해 주었다. 이왕지사 해야 할 일이라면 기쁘게 살아야 할 것 아니냐면서 길가에서 따온 각종 ‘꽃씨’를 주면서 격려했다. 그날부터 우편배달부는 외딴 시골길을 갈 때마다 길가에 아내가 준 꽃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냥 무심코 가는 것보다 훨씬 재미나는 일이었다.

그 다음해 봄이 되자 그 벌판 시골길에 들꽃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따라 색다른 야생화가 피어났다. 가을이 되자 유난히 키가 큰 코스모스가 가을녘 그가 오가는 길목에서 그를 반기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는 예전과 달리 그 외딴집에 배달 가는 일이 손꼽아 기다려질 정도였다. 꽃이 만발한 시골길을 걷다 보면 소풍 나온 소년처럼 마음이 가벼워져 일주일간 쌓인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는 것이 그 글의 내용이었다.

알고 보면, 저마다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길이 어쩌면 이 우편배달부와 같다는 생각이다. 원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도 없기에, 인생은 한 번 태어난 이상 좋으나 싫으나 예외 없이 걸어가야 할 힘든 인생길이다. 더욱이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기만의 고뇌를 안고 묵묵히 살아가야 하는 길이기에, 힘들고 고달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칫 좌절하기 쉽고 남을 탓하며 불평하기 쉽다.

그러나 좌절하고 불평한다고 해서 무엇 하나 나아지는 것은 없다. 나아지기는커녕 불만을 가지면 가질수록 괴로움은 커지고, 좌절하면 할수록 희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왕에 걸어야 인생길이라면 차라리 우편배달부처럼 내가 가는 그 행로에 ‘꽃씨’를 뿌리며 가끔 긍정적으로 미소 짓고 칭찬도 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대하지도 못한 행복과 기쁨의 꽃송이들로 내 삶이 ‘코스모스 만발한 들판’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기에 조동화 시인은 ‘나 홀로 꽃피어 저 풀밭이 꽃밭이 되겠느냐고 말하지 말라. 내가 꽃피고 네가 꽃피면 세상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지 않겠느냐’고 한 것 아닐까.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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