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묵묵한 헛수고

2011-08-0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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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속의 부처

진. 선. 미. 그것은 자체로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삶의 가치이다.

그것은 삶의 보편타당한 목표이며, 그 방향을 제시하는 일반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지침이기도 하다. 아니. 그것은 그 너머의 아득한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철학자 플라톤은 우주의 실재를 감각적 경험의 세계인 현상계가 아니라, 진선미가 충만하다고 하는 초감각적인 이상세계에서 찾았다.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세계를 불교에서는 해탈의 세계라고 한다. 해탈이란 인
간 심성의 밑바닥에서 호시탐탐 무한진화를 노리는, 그 원심력의 근원인 ‘갈애’가 모두 멸진된 상태이다. ‘나’라는 아집과 더불어 모든 번뇌의 원천이 되는 갈애라는 에너지가 완전 연소된 초탈의 세계인 것이다.


그 사무치는 갈애의 멸진은 우주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나와 너, 선과 악, 호오와 우열 등, 이분법적이며 주관적인 가치와 감정이 개입된 ‘차별’이 아니라, 다만 구분으로써, 탈 이분법적인 ‘차이’(다름)의 기호임을 자각하면서 성취된다.

그리하여 그 세계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관하지 않아, 결국 나 아닌 바 없는 ‘우리’가 된 경지이며, 또한 그 경지는 진. 선. 미의 당체인 성자의 지순한 자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세계라는 한 울타리(우리) 속에서 공존하고 더불어 상생하는 공동 운명체라는 확장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라는 진리를 받아들인 지혜로운 성자는 마땅히, 중생이 아프면 자신도 아프게 된다. 붓다께서는 ‘마차의 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몸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지혜의 즉각적 발현이 자비라고 설하셨다. 따라서 자비의 실행이 없는 지혜의 언명은 허망하고 ‘망령된 증참’일 뿐이다.

그러기에 성자는 무한자비로 한없이 수고로워진다. 그 수고는 티끌만큼의 대가는 물론, 상(相)이라는 자만의 티도, 움직임의 흔적마저도 없다. 닫혀버린 세속의 눈에는 완전한 ‘헛수고’인 것이다.

그야말로 바보스러운 성자가 된다. 그래서 자비의 무한한 실천 행은 바보가 눈 더미로 우물을 메우려는 수고처럼 어리석은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보와 바보 성자는 모두 행복한 바보들이다. 바보는 모르니까 천진하고 행복하다. 또한 배부르고 등만 따습다면, 바보는 정상인들이 한 사람의 인격으로 살고자, 그토록 모색한 모든 속박에서 해방된 열외 자이기에 행복하다.


그러나 바보는 정상인들의 인간적인 삶을, 그리고 진. 선. 미란 지극한 가치를 지향하며 살 때, 그 여정이나 어름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알 도리가 없기에, 그저 불쌍한 것이다. 성자 역시 그 정상인의 ‘정상’과 다른 면목을 지니고 있어 바보스럽다고 여긴다.

그러나 바보성자는 바보와는 달리 그 ‘정상’이라고 하는 것들을 다 안다. 나아가 그 정상인들이 인간으로서 지닌, 불가피한 불완전성과 심리적 불균형에서 비롯된 번뇌와 고통이라는 한계를 극복한 해탈자이며, 해서 진. 선. 미가 혈육 화 되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이상적인 인격의 진면목이다.

그러한 성자의 바보 같은 헛수고인 자비의 실행은, 또한 영원히 ‘미완이 완성’인 것으로, 바보스럽게 살지 않으면 결코 묵묵할 수 없는 성스러운 미덕이다. 따라서 바보성자의 그 ‘묵묵한 헛수고’는 바라마지 않아야 할, 진실로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삶의 궁극적 가치다.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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