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위대한 포기

2011-07-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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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속의 부처

‘상추꽃 핀/ 아침/ 자벌레가/ 기어가는/ 지구 안쪽이/ 자꾸만/ 간지럽다’(유재영의 시 ‘오월’ 전문).

요란을 떨던 봄이 어젠데,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 봄은 고사하고 그새, 이렇게 살림살이가 아름차버린 풍경을 진즉에 눈치 채지 못했다. 뭉그적거리다 일어난 어느 휴일 아침, 내 토굴(?)의 뒤뜰로 난 작은 창을 무심코 밀자, 그 동안 너무나 익숙해서 허투루 지나쳤던 무던한 풍경들이 갑자기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제한된 창틀, 손바닥만한 그 사각공간 속에서도 온갖 존재들의 ‘놀이’가 한창임을 새삼 보게 된 것이다.


메마른 줄기들이 엉켜 있던 포도나무 이엉도, 다투어 자란 짙푸른 잎들로 그득해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여린 덩굴손들이 허공으로 안간힘을 다해 제멋대로 뻗는데, 그 ‘소리 없는 아우성’들이 예쁘다.

다람쥐 한 쌍과 서너 마리의 낯선 새들이 도두 뛰는 고양이의 장난스러운 공격을 피해, 다들 희롱의 낌새가 짙은 비명을 지르면서 고양이에게로 날았다가, 다시 대추나무 가지 사이를 이리 뛰고 저리 날며 부산을 즐긴다.

날개라는 통한의 한계 때문일까. 시퉁해진 고양이가 그만, 감나무 밑동에다 그 수고로운 몸뚱이를 누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도 무료한지 몸을 털고 일어난 고양이가 하품을 크게 한번 하고는 허리를 쭉 편다. 다시 생기가 되돈 듯한데, 느닷없이 제 꼬리를 잡겠다고 뱅글뱅글 맴돌기 시작한다. 해오름 때의 돋을볕이 상추꽃대가 피워 올린 좁쌀만한 꽃송이들 위에서 황금빛으로 빤짝인다. 포근하고 연한 바람이 언뜻 들창을 넘보자 코밑이 간질간질하다.

그래, 세상에는 하찮게 여겨도 좋을 ‘괜’한 존재나, 쓸모없어져 여분이 된 ‘나머지’란 존재는 없다.

대지는 어머니의 자궁이다. 햇볕과 물과 바람은 모든 존재들의 탯줄이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의 낙하, 그리고 미물인 자벌레 한 마리의 꿈틀거림과 지구가 교감하고, ‘소리 먹임’으로 서로는 물론 우주와 소통한다. 또한 모래 한 알도 있을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존재와 끊임없이 관계하며, 모두들 세상을 이다지도 아름답게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주는 역동적인 통일체로써, 모든 존재들은 각자가 중심 아닌 중심으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실로 서로에게 귀중한 ‘의미’이며 ‘가치’들이다.

세상은 그렇게 조화로운 ‘우주적 놀이’로 끊임없이 즐겁고 간지러운데, 우리는 아직도 한울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만’ 만세를 노래하고 있다. 그 누구 ‘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완강한 고집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탐욕 때문이다. 만지면 만질수록 커지고 분화하는 탐욕이라는 괴물 때문이다. 또한 탐욕은 내 안에서 ‘충혈된 이기심’으로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해로운 벌레이다.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 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오현 스님의 선시 ‘내가 나를 바라보니’ 전문).

허허, 모를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거 어째 내 안쪽이 스멀거리네. 자꾸만 스멀거리네. 아, 거기 누구 없소?

여기, 옹골차게 행하면, 그럴 수없이 산뜻하고 통쾌하며 더없는 지복까지 누리게 된다는 붓다의 계시가 있다. “움켜쥔 것은 셀 수가 있다. 그러나 놓아 버리면 무한이다.”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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