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찌그러진 밥솥

2011-06-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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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은 내내 행복했다. 한두 달 사이에 멕시코에 세 번, 브라질에 한 번 다녀왔다. 치과 봉사를 위한 단기 선교여행이다. 정해진 근무시간 동안 내 오피스에 찾아오는 환자만 진료한다면 평생 걸려도 다 만날 수 없도록 많은 환자들을 선교지에서 만났다. 피부가 검든 희든, 조금 나은 환경이든 빈민가에서 살든,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가 아팠고 가난했다. 나는 이동식 치과기재(mobile dental equipment)를 싸들고 그들을 찾아갔다.

선교지에 들고 다닐 수 있도록 개발된 치과기재는 날로 발전한다. 값이 비싼 대신 더 정확하고 더 날렵한 모양으로, 최신 기술을 집약하여 만들어진다. 일반 치과오피스에 가면 기재들이 방 하나를 차지할 만큼 여러 가지인데 그 많은 것들을 수트케이스에 차곡차곡 접어 넣을 수 있도록 부피를 줄여서 컴팩트하게 만들어졌으며 기능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렇게 기재는 첨단이라도 소독기는 어쩔 수 없이 구식이다. 좋은 소독기는 부피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나는 한국식 압력밥솥을 소독기로 쓴다. 선교여행 짐을 쌀 때마다 커다란 압력솥이 가방에 들어가지 않으니 한손으로 가슴에 안고 간다. 공항에서 사람들이 날 보면서 킥킥 비웃어도 할 수 없다. 남미로, 아프리카로, 태평양 섬나라로, 하도 끌려 다녀서 이제는 여기저기 찌그러진 내 압력솥! 옷가지, 세면도구 짐보다 더 중요한 녀석! 그래도 이것이 없으면 기구를 소독할 수 없다.


이번 멕시코 일정이 끝나자 바로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로 갔다. 상파울루에서 선교사 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평소에 기도편지로 만나던 여러 선교사님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기쁨이 크다. 총회가 열리는 동안 나는 또 다시 도심에서 네 시간 거리, 빈민가를 찾는다. 도시의 뒤안길, 빈민촌 사람들의 삶은 스산하다. 제대로 지붕 얹은 집 대신 양철 판자집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산다. 사는 모습이 어떻든 이는 아프다. 하루 종일 햇빛에 입 안을 비춰가며 치료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받은 달란트를 나누는 일뿐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환자들… 여기서 나는 조엘 하야시 전도사님을 만났다. 그는 이미 80년 전 브라질에 선교사로 건너온 증조부 이래 일본 이민 3세가 된 젊은 치과의사이자 8년째 아마존 정글에서 살아온 선교사이며 한인교회 전도사이다.

우람의 체격의 그는 유창한 포르투갈어와 영어로 나와 함께 환자를 돌보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했다.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이고 치과의사용 헤드라이트를 이마에 단 채 두 손에 든 기타와 입에 문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다가 중간중간 밀리는 환자를 보았다. 진료가 끝나고 우리는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첨단 치과기재를 몇 번씩 쓰다듬어 보더니 그가 말한다. “아마존으로 치과사역을 들어갈 때 이런 게 있으면 참 요긴하겠네요.” 나는 선뜻 그 기계 케이스를 내밀었다. “조엘 선교사님! 당신이 쓰시오.”

세계 곳곳에서 만난 선교사에게 이동식 기재를 나눠주기 시작한 것이 이번이 네 개째다. 하나는 콜럼비아에, 하나는 멕시코에, 하나는 둘로스 선교선에 가 있다. 현지에서 그 기재들이 잘 쓰일 것을 생각하면 나의 가슴은 막 부푼다. 일정이 끝나 또다시 나를 기다려준 내 오피스 환자들을 만나러 LA로 돌아왔다. 찌그러진 압력솥을 안고... 참 행복한 나.


김 범 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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