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절대가치, 절대사랑

2011-02-2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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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일상, 깨달음

2월이 되면 여섯 아이들과 이른 봄나들이를 하곤 한다. 학교를 안가는 공휴일이 다른 달보다 많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온 식구가 함께 모이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아 아쉬움이 큰 가운데 올해는 공휴일과 밸런타인스 데이가 겹친 덕에 아빠도 함께할 수 있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성인이 된 딸들이 쏟아내는 사랑스런 질문에 아빠의 입은 귀에 걸린다. 내가 볼 때는 다소 엉뚱한 질문도 많건만, 남편은 내내 ‘그저 대견하다’는 표정이다. 심리학을 전공한 딸의 예리한 질문에 다소 긴장되기도 했지만 언제 이렇게 컸을까 하는 마음에 나 또한 흐뭇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초,중,고,대학원까지 제각기 다른 시간 속을 달려가는 여섯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 내겐 큰 배움터임을 절감하는 순간, 여섯 낳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보니 다른 부모들처럼 아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지도 못했다. 이민목회에 올인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시간을 교회에 쏟았던 부족함 뿐인 엄마였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 다섯을 챙기느라 고충이 많았던 큰아이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득하고, 함께 어울려 불평 없이 믿음으로 잘 커준 아이들이 대견할 뿐이다.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은 예쁘다는 말처럼 아직 철부지들이지만 모든 것이 그저 고마운 것은 분명 내 힘이 아닌 것 같다.


부모라는 특별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씌워주신 ‘절대사랑’의 안경 때문이 아닐까? 아무 조건 없이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 싶은 마음, 장성한 자녀까지도 끊임 없이 챙겨주려는 못 말리는 그 사랑이 나를 자녀들의 많은 실수를 용납하며 기다려 줄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게 해 준 것 아닐까.

사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이 정도의 사회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개개인의 절대가치를 인정해 준 그 누군가의 ‘절대사랑’이라고 믿는다. 그 절대사랑의 주인공이 부모님이시다. 특별히 어머니들의 사랑은 죽음까지도 불사할만큼 초인적인 것 같다. 살아 생전은 물론돌아가셔서도 그 남겨진 정신과 교훈으로 훌륭한 자녀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어머니들의 ‘자녀사랑’ 개념이 많이 변한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던 어머니의 교훈이 사라져가고 있다. 가치의 혼동으로 보이는 것에만 매달려 사는 부모들이 많아졌다.

인내와 사랑으로 가정을 지켜내던 부모들의 ‘기도무릎’이 그리워진다. 순수와 정직, 성실을 양식으로 삼는 무던함이 무시당하는 사회를 비판만하기보다는, 내가 바로 그런 사회를 만들지 않았을까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내가 만든 길을 내가 가고 있고 우리가 만들어낸 길들이 모여 지금의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기에, ‘남탓’을 하기보다는 ‘나와 내 가정’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는 것이 현명하리라.

순수한 사랑은 따지지 않고 숨겨진 가능성을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이 아닐까. 깊은 사랑은 조용하다.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올해는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고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배우고 싶다.

정 한 나
(남가주광염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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