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추 한 알의 행복

2010-11-08 (월)
크게 작게
반가운 가을비가 밤새 내리더니 조석으로 쌀쌀한 바람이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몇 년 전 심은 대추나무가 올해는 제법 많은 열매를 선물해 주어 가을이 한층 풍요롭고 행복하다. 빨갛게 익은 대추를 따면서 그동안 잊고 지났던 많은 감사가 퍼즐처럼 조각조각 맞추어 모아진다. 작은 묘목을 구해서 심을 때는 어느 세월에 대추를 딸 수 있을까 아득했는데. 몇 년 새 굵어진 가지 사이로 반짝 거리며 달려 있는 대추 녀석들이 얼마나 예쁘고 고마운지 굵고 큰 대추하나를 따서 코에 바짝 대고 ‘수고했어. 사랑해’ 하며 찐한 뽀뽀를 해 주었다.

언젠가 보았던 대추사랑 노랫말이 오버랩 된다. 가슴이 뭉클하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장석주님의 ‘대추 한 알’ 중 한 구절인데 이 짧은 문장이 나의 가슴에 기쁨을 준다.


작은 대추알 하나도 제 몫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시련과 아픔, 내려놓음을 거쳐야 하는데 사람이 제 구실 하기까지는 얼마나 더 많은 태풍, 천둥, 벼락, 바람을 통과해야 할까? 설익고 어설픈 맛을 내면서도 세상을 다 책임질 듯 떠들어대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는 것 같다.

말이 없는 과일도 익기까지 묵묵히 자기자리를 지키며 깊고 깊은 맛을 만들어 내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익지도 않은 존재를 부끄럼 없이 큰 소리 치고 사는지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이민목회 이십여년 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 놀라운 것은 단 한 사람도 가슴 속 뜨거운 간증이 없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용한 성도님도 말문이 트이면 밤을 새도 모자란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 앞에 많은 것을 느낀다. 결국 사람들은 누구나 내면에 수많은 보물들을 갖고 있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참고 기다려 주었는지, 이만큼 살기까지 장애물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그것들을 힘겹게 넘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다듬어졌는지….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면, 나 역시 상대방이 그 깊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주어야 하는 게 정상이지 않을까.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직도 주위에 깊은 사랑을 품고 계신 귀한 어르신들이 많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아무 말 안 해도, 하루 종일 함께하지 못해도, 그분들의 삶을 스쳐만 가도 깊은 맛이 묻어나는 귀한 어른들을 뵐 때마다 그들의 ‘인내’와 ‘사랑’에서 진한 감동을 느낀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65억의 사람들이 지구란 별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고유한 사명 또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소중한 조건 중 하나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처럼 남도 소중한 사랑을 받아야 되는 존재임을 잊지 않을 때,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가능한 우리의 인생은 행복한 퍼즐 맞추기다. 잃어버린 작은 조각 때문에 안타까울 때도 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그 작은 조각은 희미했던 그림을 완벽하게 만들어준다.

대추 한 알 속에 감춰져 있던 작은 행복 퍼즐조각 덕일까. 오늘은 가을이 내 가슴 속에서 웃고 있다. 하늘하늘한 일곱 개 꽃잎 속에 우주를 담은 하이얀 코스모스의 깊은 미소로.


정 한 나 (남가주광염교회 사모)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