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가 만난 북한 사람

2010-11-0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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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LA기윤실과 함께 한 북방선교 여행 중 중국 길림성 연길에서 집안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의 경험이다. 두만강을 끼고 장장 열 시간을 운행하면서 홍수로 길이 파인 곳을 피하며 동네마다 정차하여 사람을 태우는 전형적인 시골버스였다.

40개 좌석 중 반 정도가 찼는데 필자 바로 뒤에 앉은 북한 인민복을 입고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단 깡마른 얼굴의 사내에게 관심이 갔다. 감시자가 없는 것 같아 그와의 대화를 통해 북한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하나님, 저 북한 주민의 마음을 열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 동석해도 되느냐고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간식으로 준비한 초코파이를 건넸다. 남한 과자를 처음 먹어보는지 “야, 입에서 살살 녹누나”라는 말로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더니 서로의 여권을 바꿔 보며 다정하게 사진까지 찍는 상태로 발전했다.

그는 필자와 동갑으로 10년만에 연변 누님댁을 20일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한다. 필자가 북한 태생으로 일곱 살 때 남한으로 넘어와 20여년을 산 뒤 미국에서 30년 넘게 거주하고 있다고 자기 소개를 하였더니, 조금씩 마음문을 열고 때 묻지 않은 모습으로 대화에 응해 왔다. 얼마 전 월드컵 경기에서 북한이 포르투갈에 7대0으로 패한 경기를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선수들이 먹지 못하니 힘껏 뛰질 못해 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살기가 어떠냐는 질문에는 “배가 고파 못살겠다”고 답한다. “당에서 매일 옥수수와 쌀 섞은 양식 300그램을 배급 주는데, 적어도 600그램은 되어야 한다. 한 번 배부르게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 300그램이 얼마인지 감이 안 와 옆에 있는 패트 물병의 얼마큼에 해당하느냐고 묻자 3분의2 정도라며 배급 식량에 산나물, 배추 등을 넣어 죽을 쑤어 먹는다고 말한다.

1990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해와 기근으로 자기 동네에서 몇 명이 굶어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금년에도 큰 홍수로 겨울나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한숨을 내쉰다. 남한과 국제기구가 수많은 구호물자, 약품과 식량을 보냈는데 받은 적 있느냐는 물음에 전혀 받지 못했고 구호식량 배급 소식은 몇 년 전 들어보았다는 대답이었다. 천안함 사건이 금시초문이라는 말에서 폐쇄된 사회상을 엿볼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노동신문을 읽어주는 독보회를 통해 국내 소식을, 저녁 자아비판과 사상교육 시간을 통해 국제정세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작년 11월부터 누님댁 방문을 위한 여권수속을 시작했는데 당과 여권과에 줄 뇌물 2,000원을 목돈으로 주지 못해 매월 200원씩 월부로 금년 8월까지 갚아 여권을 발급받았단다. 그러면서 깎아서 1,800원만 줄 것을 그러지 못했다며 후회한다. 돈만 주면 안 되는 게 없을 정도로 당이 부패한 것을 한숨 쉬며 원망하는 그의 모습에서 북한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귀국하면 떠나기 전 당 간부가 부탁한 이불 두 채와 냉장고 얼음보숭이 만드는 기계를 해 주어야 하는데 누님의 사정이 어려워 뇌물을 준비하지 못해 당간부로부터 시달릴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는 그가 너무 딱하게 보여 우리 일행은 헤어질 때 중국 돈으로 이불 두 채 값을 주었다.

가슴에 단 김일성 배지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묻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모시고 다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대답에 우상화된 김일성 왕조의 허상을 실감했다. 북한 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사정을 더 알게 되었고 배고픈 북한 어린이들을 먹이는 LA기윤실의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을 우리 교회가 계속 후원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강 신 평 목 사 / 뮤리에타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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