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희(古稀)를 맞으면서

2010-07-02 (금)
크게 작게
김윤태(시인)

예전에는 평균 수명이 오늘날의 평균 수명처럼 길지가 않아 칠십년을 산다는 것이 그리 흔치 않아서 부모 나이 칠십이 되면 자손들이 나서서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도 할 겸 환한 얼굴에 기쁨을 섞어 생일잔치를 크게 했다.세월 가더니 어느덧 나에게도 어김없이 칠십이란 나이가 찾아 왔다. 남들이 다 하듯이 내 아들과 딸이 칠순 잔치를 상의하며 생일잔치 준비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했다. 그리고 사양했다. 나는 부끄러웠다. 아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었다.나는 70도 안 된 채 66세에 마감 도장을 찍고 한국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환갑을 차려드리지 못하였고, 미국에서 외롭게 사시다가 파란만장한 삶을 결재하고 92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칠순도 차려드리지 못하였다.

고희는 누구에게나 한평생에 있어서 최대의 기쁨이며 최대의 잔칫날인데 나는 내 부모에게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한 막심한 불효자였다. 무슨 양심과 무슨 얼굴로 내가 고희를 맞았다고 덥석 잔칫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늘의 엄명을 나는 지키지 못한 죄인이니, 죄인은 죄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다.나는 칠남매의 맏이다. 아버지 대신 같다는 맏으로서 형제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고 형제들 간의 불화도 잠재우지 못하고 우의도 다지지 못하였다. 그러니 형제들의 삭막한 인사도 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문학을 한답시고 어려서부터 서울의 뒷골목이나 명동 또는 절집이나 항구, 몇 사람 살지도 않는 섬 구석을 찾아다니며 행자 노릇을 많이 했을 뿐이었지 뭐 하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회에 공헌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출세 길로 달릴 수 있는 기회도 왔었지만 그 짓도 바람 같은 짓 같아 모두 동댕이치고 빈손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 왔다. 할 일이 수없이 많은 사회를 외면하고 돌아섰던 내가 무슨 낯으로 사회의 한 구석을 빌려 잔칫상을 받겠는가!


옛날에는 나이 많이 든 사람이 눈에 보이면 그래도 인사는 건네고 지나쳤지만 현대라는 요즘에 와서는 신세대라는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늙은 구세대 사람들이 안중에도 없다. 나이 많이 들어버린 것이 죄다. 나이 많이 먹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면박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나는 나이 든 것이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에게 죄스럽다.아기들은 태어나면서 첫 번째로 어머니 젖을 빤다. 저 살기 위해서 어머니를 다 빨아 먹는다. 그러다가도 배가 부르고 심심하면 어머니가 아프거나 말거나 어머니의 젖꼭지를 깨문다.어머니는 눈물이 핑 돌도록 몹시 아프면서도 아기를 혼내거나 때리지 않는다. 나도 얼마나 많
이 어머니 젖꼭지를 물어뜯었을까?어머니도 가시고 아버지도 가시고 고아원이 된 산 속의 내 집,사람에게는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눈에도 보이는 것이 있어 말하지 않아도 보고 싶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찾아 나서고 싶어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신 길은 지도에도 없어 찾을 수가 없다.

나도 방향조차 알 수 없는 삶을 살아 왔다. 지도에도 없는 인생길, 헤매면서 살다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신 길을 헤매면서 찾아 나설 것이 아닌가!
잘못을 빌기 위하여....그 뿐이다. 죄인의 길, 거기에 무슨 잔치가 있겠는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