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6월이면 생각나는 일

2010-06-29 (화)
크게 작게
박중돈(법정통역)

북한의 6.25남침, 기습적인 침략을 당한 남한의 방어선은 허무하게 무너져 사흘 뒤엔 서울이 함락되고 석 달 뒤에는 대구 근교의 낙동강까지 전선이 밀리고 있었다.그 해 8월에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계시는 시골에 이르는 길은 전시 작전을 이유로 교통이 차단되어 있어서 우리 가족은 서로 이산 가족이 되어 있었다.전황이 점점 급박하게 밀려 대구에서도 곧 피난길을 떠나야 할지 모를 급박한 지경이 되어 있었다. 모두 라디오를 통한 정부의 피난 명령을 기다리느라 밤을 새고 있었다. 막상 피난을 떠나게 된다면 제일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식량이었는데 아직도 우리 형제가 감당할 수 있는 식량이라야 겨우 미수가루 두어 말이 전부였고 산후 회복에서 얼마 되지 않는 어머니는 거의 아무런 짐을 질 수가 없는 체력이었다.

이런 비상사태에 이르러 어머니와 장남인 나는 가족들의 생존을 위한 심각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였다. 피난을 떠나게 된다면 나와 10살 난 아래 동생은 각기 미수 가루 한 말 식을 지는 것이 전부였고 어머니는 세 살배기 남동생을 돌보아야 할 것이므로 결국은 바로 태어난 여동생을 돌볼 손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린 우리 삼형제의 생존을 위해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결국 뼈를 애는 듯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머니가 울면서 제안을 했다. 갓 태어나 아직 정이 들지 않은 여동생을 버리고 가기로 선언했다. 살아 있는 식구들의 생존을 위해 갓 태어난 아기를 포기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때 우리 집의 아래 방에는 경찰 간부 가족이 세를 들어 있었는데 이 경찰의 주선으로 어쩌면 경찰 트럭에 끼어 피난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계시는 마을을 지나게 될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차를 멈추어 아버지에게 연락을 할 수는 없다
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에게 전할 편지를 준비하고 봉투마다 돌맹이를 집어넣어 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던지기로 하고 봉투를 여러 개 만들었다.

편지를 쓰고 돌을 넣은 봉투를 만드는 동안 하염없는 눈물을 뿌리고 소리 죽여 통곡을 하시던 어머니의 기억이 지금도 내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이제 전선은 바로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었고 나는 낮에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 위에 올라가 연합군의 공군 전투기들이 공중에서 내리 꽂히면서 폭격을 하는 장면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밤낮을 이은 무지무지한 폭격이 며칠이나 계속되더니 UN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이루어졌고 결국 UN군의 반격이 주효하여 공산군의 퇴각이 시작되어 우리는 피난길의 마지막 순간에 길을 떠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래서 우리 식구는 6.25전쟁 중에 피난을 가지 않고 버틴 몇 안 되는 운 좋은 소수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버려질 운명에 놓였던 여동생은 뒤바뀐 운명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60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은 환갑나이로 캐나다의 토론토에 살고 있다.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는 가족모임으로 뜻깊은 그의 생일잔치를 꾸미고 싶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