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무소유>가 어딜 갔을까?

2010-06-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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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지난 3월 입적한 법정 스님이 자신이 쓴 책들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자 대표적 저서 <무소유>가 인터넷 경매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치솟은 적이 있었다. 8,000원짜리 책이 21억원까지 치솟은 황당한 가격은 실제 구매의사가 없는 허위입찰로 경매가 취소된 해프닝으로 끝났었다. 자연히 내가 갖고 있던 <무소유>를 찾아보았는데 책장에도 책상위에도 아무리 찾아도 그 책이 눈에 띄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무소유>에서 3년 가까이 애지중지 키우던 난초를 어느 날 뜰에 내놓은 채 외출을 했다가 부랴부랴 돌아와 보니 잎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난을 가꾸면서 산철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하고 밖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것이 모두 지독한 집착이었다는 것이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난을 안겨주고 비로소 얽매임에서 벗어났다며 이때부터 하루 한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고 한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를 터득했다는 것이다.나는 그 책을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읽곤 했었는데 도대체 어딜 갔을까, 누굴 빌려주었을 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이민 가방 가득 한국 책을 사왔었다. 책장을 그득 채운 책은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했고 남에게 빌려주기가 아까웠었다. 책에 대한 애착도 강했고 일단 빌려간 사람은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 우리나라 옛말처럼 잘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 책에서 얻은 지식, 그 속에서 내가 받은 감동을 남들과 나눈다 생각하니 그 감동이 반분되는 듯한 기분도 들었었다.그런데 아마 법정의 <무소유>를 읽은 후였지 싶다. 아무리 화가 나고 불안 초조해도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스르르 풀리고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큰일도 별일 아닌 것으로 마음에 평화가 오는 느낌,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졌다.

책 속에는 상처받고 흐느끼고 다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절망하지 말라고 위로 해주고 용기와 꿈을 준다. 그래서 살기가 힘들어 보이는 친구, 사는 재미가 없다는 친구, 배반당하고 상처 입은 친구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 주고 책을 나눠주기 시작했다.주위사람들에게 책을 한보따리씩, 한 박스씩 빌려주고 나눠주고 하다 보니 아마 <무소유>도 그 어느 틈새에 들어간 것이렸다. 몇 주 전에는 책을 빌려준 사실조차 잊어버렸던 한 친구가 책을 돌려주며 답례로 CD와 초콜릿을 한아름 안겨주기도 했다. 내가 빌려준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달래주는 것에 대만족이다. 책장이 비면 빌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고 있다.

그러다 문득 책이 아닌 돈을 빌려주었어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했다. 그냥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흐뭇하겠지만 과연 돌려받을 수 있을 까 하면 초조 불안할 것이다. 책뿐 아니라 돈도 사람들에게 빌려줄 수 있는 형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돈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것 같으니 그저 남의 신세나 안지고 살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야박하지 않아서 언제라도 돈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하는 고마운 친구도 있는 법이다. 나는 그 친구를 평생 간직할 것
이다. 그런데 말로는 무소유를 따른다지만 자꾸만 생각난다. 내가 아끼는 책, 법정의 <무소유>는 누가 빌려갔을까? 그것만은 돌려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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