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2010-06-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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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영(목사)

20세기 지식인들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끼쳤던 영국의 사상가 러셀(1872-1970)은 그의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에서 “기독교는 교회의 제도와 교회자체를 예수의 복음과 윤리보다도 더 중요시하였다”고 하면서 예수의 복음의 핵심인 이웃사랑, 즉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누어 쓰는 일’ ‘싸우지 말라’ ‘간음한 자를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등의 예수의 실천윤리에 대해서 교회는 큰 의욕을 보여주지 않았고, 오히려 권위주의와 강압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심지어는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한 싸움’까지도 서슴없이 감행했다고 지적하였다.
즉 교회와 예수의 윤리, 그리고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이분화시켜왔던 것이다. 사실 십계명도 그 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요 그 반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성서자체도 구약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신약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성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개의 구원의 수레바퀴가 동시에 가동될 때 수레(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웃사랑을 한마디로 압축시켜 놓은 비유가 곧 ‘강도 만난 자의 비유’이다. 내용을 보면, 예배를 담당하러 가던 한 제사장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사람을 보고 피해 지나갔다. 그리고 레위인 역시 피해 지나갔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가지 않고 불쌍히 여겨 자기의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비를 부담하고 그를 살려주었다. 그리고 예수는 “이 세 사람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묻고 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란 러셀의 질문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란 예수
의 질문은 어쩌면 영혼구원만 강조하는 우리네의 교회들과 기복주의 신앙에만 깊이 잠식된 교인들과 또한 교회들의 위선을 동시에 조명하는 두 개의 헤드라이트가 아닌가 생각된다.


6월은 아버지의 달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대구의 한 문둥병자 교회에서 37년간 시무한 가난한 목사였다. 6.25사변 때 인민군들이 진격하여 다 부산으로 피난 갈 때 부친은 “나는 이 나병환자들과 이 곳에서 같이 죽겠노라”고 고집하셔서 폭탄 떨어지는 텅빈 대구 땅을 지키며 나병환자들과 동그마니 남아 죽음을 기다리셨다. 나는 나병환자를 위하여 헌신한 ‘다미엔’을 한 에로 들고 싶었지만, 부친이 실천하신 희생정신을 가까운 한 예로 선택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날, 권총을 든 강도가 우리 집을 침입해 아버지를 죽이려 했으나 그 강도를 용서하시고 감동시켜, 아버지는 결국 그를 목사까지 되게 하셨다.

매년마다 다가오는 아버지날, 나는 러셀의 질문과 그리고 예수가 묻는 법정에 서서 괴로워하고 있다. “네 부친을 보라! 너는 종교업에 종사하는 비기독교인, 직업목사가 아니냐!” “네 부친은 선한 목자였는데 너는 삯군 목자냐!” “네 유익을 위해 마음대로 성경해석 하였고, 너는 복음보다 율법과 관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네 잘못한 동료의 인권을 매장시키려고 하
였지!” 숨막히는 추궁과 변호사 없이 집행되는 이 악몽의 재판을 통해서 나는 그저 묵비권만 행사하다가 드디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존경하옵는 예수 재판장님! 러셀 검사님! 나는 사실, 기독교인이 아닙니다!”라고 자백한 후 황급히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니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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