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또 싸워서는 안 된다

2010-06-1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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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전쟁은 사망자와 부상자 400만 명을 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연출하였다. 지금부터 꼭 60년 전의 역사이다. 미국만 해도 54,246명의 젊은이가 한국 땅에서 전사하고 103,284명의 부상자를 냈다. 고아 과부 이산가족이 홍수를 이루고, 학살 납치 복수극이 고을마다 터져 한반도는 피의 수라장이 되었다. 가옥, 교량, 공장 등은 물론이고 길과 산까지 파괴되어 아름다운 금수강산은 폐허가 되었다. 동족상잔의 세계역사 중 한국전쟁만큼 처참한 싸움은 지구상에 없었으며,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두 토막이 난 분단의 슬픔과 대결 구도는 사라지지 않고, 최근 천안함 사건을 통하여 긴장은 오히려 고조되고 있는 형편이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영웅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핵무기 면에서는 거인이며 도덕면에서는 유아이다. 우리는 평화 건설보다 전쟁 기술을 더 많이 알고 있고, 사람을 살리는 연구보다 죽이는 연구를 훨씬 더 많이 하고 있다. 이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핵 연구보다는 예수의 산상보훈(山上寶訓)을 더 많이 공부해야 할 것이
다.” 산상보훈이란 신약성경 마태복음 5장-7장을 가리키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외치는 예수의 설교이다.


한자에는 평화를 나타내는 세 가지 낱말이 있다. 和(화)는 입 속에 밥이 있다(禾는 벼 화)는 구상으로 경제적인 평화를 말한다. 安(안)은 집안에 여자가 있다는 구상으로 사회적 평화를 나타낸다. 平(평)은 심장 두 개가 나란히 공존하는 구상으로서 평화의 이념을 나타낸다. 평화를 가지려면 네 마음과 내 마음이 동등한 입장에서 사이좋게 공존해야 한다는 옛 사람들의 지혜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예수의 말씀도 자기를 존중하듯 이웃도 존중하는 것이 사랑을 가능케 하는 원칙이라는 뜻으로서 옛 중국인이 두 개의 심장을 나란히 공존시켜 평(平) 자를 만든 이치와 같다. 이것은 한 가정의 평화로부터 나라와 국제적인 평화까지 어디에나 적용되는 원리이다.

한국전쟁 때 남한의 피해만도 엄청났다. 사망자 15만 명, 행방불명 20만 명, 부상자 25만 명, 납치된 자 10만 명, 공업시설의 43% 파괴, 발전시설 41% 파괴, 탄광 50%, 주택의 3분의 1이 파괴되었다. 북한의 피해는 이보다 훨씬 더 크다. 지난 100년은 전쟁과 증오의 세기였다. 세계 1차 대전(1914-1918)에서 1천만 명이 죽었으며, 2차 대전(1939-1945)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
동전쟁을 합쳐 4천만 명이 죽었다. 천재지변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불과 한 세기 동안에 5천만 명을 죽인 것이다. 이런 살생의 역사를 또 되풀이 할 것인가? 한반도는 휴전선 양안(兩岸)에 150만 병력이 대치하고 있다. 60년 전에 비하면 무기와 화력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지상전보다는 미사일전과 핵전쟁으로 아마도 하루 안에 쌍방이 초토화될 것이다.

지금은 미움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로 코스를 돌이키고, 죽이는 경비가 살리는 비용으로 전환되고, 담을 쌓는 노력이 담을 허는 노력으로 바뀔 때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라디아서 5:13) 개인의 이익이나 정치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자유와 생명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피차 사랑의 종이 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살 길이다. 지난 100년을 통하여 인류는 귀중한 세 가지를 배웠다. ‘이데올로기보다 자유가 낫다’는 것
과, ‘자원 보다 두뇌가 낫다’는 것과, ‘대립보다 공존이 낫다’는 사실이다. 대립이란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는 교만에서 나온다. 그러나 공존은 ‘함께 살자. 서로 돕고 의지해서 함께 잘 되자.’는 형제애 정신에서 나온다. 공존공영(共存共榮)만이 인류의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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