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필름이 끊어진 사람

2010-06-0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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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 통역)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고 아무 사고 없이 지났다면 아마 멋진 술자리로 치부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사고를 일으켜 법원 신세를 지고 이민국의 추방 위험에 처해지는 경우를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몇 해 전에 푸로리다 주의 어느 타운에서 음주 운전 사고 끝에 피해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음주 운전자는 형사법원의 배심재판 끝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혐의의 유죄로 평결되었고 15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이 사람이 치사 사고를 일으킨 잘못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술에 너무 취해 있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피고인에게 과실치사가 아닌 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유죄 평결이 내려진 것 때문에 많은 논쟁이 있었던 사건이었다. 지금 퀸즈의 형사법원에 한 한국인 남성이 이와 유사한 성격의 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받고 있는 딱한 사정에 놓여 있다. 이 사람은 지난 연말에 망년회에서 어느 술집에 들러 술을 과하게 마신 끝에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그야말로 필름이 끊어진 다음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병원에 누워 있었고 자기 몸에 칼에 찔린 자상(刺傷)이 있어 치료를 받고 있었고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필름이 끊어진 상태였다. 경찰의 조서에 의하면 이 사람이 누구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고 목격자 진술이 확보되어 있었다. 법원에는 중폭행혐의와 무기소지혐의로 입건되었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액수의 보석금이 책정되어 현재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검찰은 변호사와의 협상에서 경, 형사범에 해당하는 폭행혐의로 낮추어 주고 단기 1년에서 장기 3년의 징역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수락하지 않는다면 검찰은 대배심회의를 통해서 중범재판소로 사건을 기소하고 중범혐의로 재판할 것이고 여기서 유죄로 판결되면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을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이 사건을 맡은 변호사는 무엇이나 이 사람이 내 놓을 수 있는 방어 수단, 즉 어떤 피할 상황을 설정해야 하겠는데 당사자는 그야말로 필름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라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고 하니 무엇으로 재판에 임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범에 해당하는 중폭행죄를 놓고 공판을 진행한다면 사건은 당연히 검찰의 일방적 주장에 따라 유죄로 판결 날 것이고 또한 장기 징역형이 따를 것이 너무 뻔한 노릇이었다. 그러니 억울하더라도 경범으로 낮추어 준 폭행혐의에 유죄를 시인하고 1년 이상 3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아들인다는 것 밖에 선택이 없어 거의 받아들일 입장이 되어 있었다.이 사람은 미국에 산지 20년이 넘는 영주권자이다. 하지만 폭행죄로 선고를 받고 1 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질 경우 그는 당연히 이민국에 의해서 추방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어차피 추방으로 이어질 판이라면 경범혐의라도 받아들이지 말고 위험부담을 안고라도 공판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공판에서는 술이 취해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 면죄 사유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달리 다른 방어 자료가 없어 보여 어려운 재판이 예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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