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 무한 은혜

2010-03-0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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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인도양 연안의 쓰나미 참사 때에도, 한국의 어느 목사는 그 재난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 받은 심판이라고 했다. 지난번 아이티 참사 때에도, 미국의 어느 목사는 토속종교의 악마와 결탁한 삯이며 저주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냉담했고 한편, 절망했다.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저주나, 심판, 지옥 따위에 의지해서 비롯되고 유지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열린 사랑이라고 하는 아가페를, 신학자 폴 틸리히는 “용납할 수 없는 자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납하여 변화시키는 에너지”라고 했다. 하니, 아닐 것이다.


언급된 두 목사는 그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을 능멸하고 저주하는 닫힌 신앙관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그대로가’ 긍휼이시고 사랑으로 발현된다는 하나님을 능욕했다.

하물며 국민의 반 가까이가 이미, 용납(?)되어 기독교로 개종된 아이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라니, 그 무지와 교만한 신념을, 그 용납할 수 없는 배반을 어찌해야 하나.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만이 그들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라고 했기 때문이다.
인도양과 아이티의 참담한 비극은 하나님의 심판도 저주도 아니다. 그냥 자연재해일 뿐이다. 다만, 재난을 당한 희생자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좋지 않은 시간에 좋지 않은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그 동안 인간들의 방종한 공업(共業)이 그 재난들의 가깝고, 먼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래 지구별이 앓고 있는 잦은 기상이변, 지진, 해일 등 심각한 몸살에, 인간들의 환경 오염물질 남용과 무자비한 생태계 파괴행위가 한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자연재해는 그 같은 인간들의 이기적이고 무절제한 탐욕에 가해진, 자연의 엄중한 경고이며 과보라 하겠다. 지구별을 울린 인간들의 철없는 행태가 부메랑이 되어 피눈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과 공존공생의 존재가치이며 나아가,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생명의 에너지가 되는 상생의 관계임을 유념해야 한다. 반대로 탐착하여 홀로, 그 궤도를 벗어난다면 재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재난(disaster)은 별(aster)이 자기궤도에 충실하지 않고 이탈(dis)할 때 발생하는 우주의 불행이라고 한다.


불교는 ‘세계일화’ 우주의 모든 존재가 같은 뿌리를 지닌 한 송이 꽃임을 주창한다. 그것은 우주가 인과 연의 그물망으로 끝없이 연결된 장엄한 연기의 세계임을 표방한 것이다. 결국 서로가 그러한 ‘관계’ 속에서 신세지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아챌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우주에 편만 무한한 은혜, ‘무한은’(無限恩)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무한은을 바탕으로 지구촌은 지금, 절망의 아이티에게 다투어 따뜻한 희망의 손길을 건네고 있다. 그러니 ‘일어나라 아이티야! 살아야 되지 않겠니.’ 여기는 벌써, 봄의 들목인데.


박재욱 /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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