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 - 날더러 할아버지라고?

2010-01-1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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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예쁜 딸을 데리고 치과에 왔다. 젊은 엄마가 인사를 시키자 종알종알 말을 시작한 아이가 거침없이 나를 부른다. “하부지이!” 무엇이? 날더러 할아버지라고? 당황한 엄마가 “아니야, 선생니임~, 따라해 봐!” 아이를 꾸짖듯 달래지만 아랑곳없다. 다시 한 번 확인사살이다. “하부지이…”

동창 중에 정식 할아버지가 된 친구들도 있는데 아직도 막내가 중학생인 나에게는 좀 억울한 호칭이다. 나를 위로하려는 듯 그날은 간호사들이 어머머 선생님, 오늘 그 넥타이 하시니 참 젊어 보이셔요, 괜히 평소 안하던 말을 한다.
뜻밖의 사람에게서 할아버지라 불려 본 경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남들에게도 종종 듣는다. 그리고는 대부분 놀랐다, 우울했다, 미웠다는 반응을 덧붙였다. 패스트 푸드점에서는 55살을 기준으로 1달러짜리 커피를 50센트 정도 깎아주는 ‘시니어 디스카운트’가 있다. 친구들이 시험 삼아 “난 시니어요”라고 말하자 나이 어린 캐시어가 두 번도 안 묻고 디스카운트를 해주더라고 서운해 했다.

틴에이저인 애들에게 몇 살이면 늙었다고 생각하느냐 물었더니 서른이란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는 나이에 대해 너그럽지 못했다. 나이 들면 장밋빛 인생에는 시들시들 단풍이 들고 이성을 향한 지남철 같은 파장도 거두어지며, 미적 자극에 반응하던 세련된 감각조차 뭉툭해질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황정순 시인의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가운데 한편으로 사랑받을까?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당신의 등에 기대 소리 내어 울고도 싶어/ 장작불 같던 가슴... 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 사랑하기 너무 벅찬 그 때… 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 거야…’(중간 발췌)

비틀즈의 히트곡 ‘내가 예순 넷이 되면’은 또 어떤가. ‘나이들어 머리카락 빠져 간대도 당신은 내게 발렌타인 카드를 보내주려나, 생일이면 와인으로 축하를 하고/ 당신의 방에 불이 나가면 내가 퓨즈를 갈아 주어야지/ 당신은 벽난로 곁에 앉아 스웨터를 짜고 주일 아침이면 같이 차를 타고 나가리/ 여름마다 작은 오두막을 빌려…’(중간 발췌)

인도에서는 쉰 살부터를 바나프라스타(은둔기)라 부른다. ‘산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이다. ‘학습기’와 ‘가정생활기’를 거친 시기이며 가족에게 의무를 다하고 마침내 진리를 향해 떠남으로써 마지막 단계인 ‘순례기’를 준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나이 든다고 해서 저절로 버려지지 않는 소유욕을 다독이는데 도움이 된다.

과학자 최재천 교수는 저서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에서 인생을 두 시기로 나누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번식기와 그 이후의 삶이 시작되는 번식후기이다. 이 설명도 자칫 감상적이 되기 쉬운 나이에 관한 상념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준다.

할아버지면 어떠랴. 은둔기, 번식후기에는 모쪼록 인생의 초점이 ‘내 것’에서 떠나 ‘내 것 아닌 것’으로 옮겨가는 삶이 되기를, 새해 아침에 조용한 마음으로 기도해 본다.

김범수 /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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