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눈치 챈 옛사람이 있어 나무는 바람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였으니, ‘드러난’ 바람의 마음은 그릴 수가 있다. 파도는 달을 희롱하며 논다 하였으니, ‘드러난’ 달의 마음은 그릴 수가 있다.
선가에서는 사람들이 마음이라 하는 것을,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이라 이름 할 수 없고 그릴 수도 없어 그것을 그냥 ‘한 물건’이라고 했다.
그래서 본래무일물.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한 것이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이기에 그릴 수가 없어도, ‘드러난’ 그 ‘한 물건’은 그릴 수가 있다.
사람의 마음을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들숨, 날숨 속에 있다고 했다. 티벳 사람들은 마음이 인간의 심장 속에 있다고 했고, 중국의 명나라 때는 사람이 남의 물건을 만지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은 사람의 손끝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날 두뇌과학자들의 견해는, 마음은 단지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일 뿐 이라고 단언한다. 반면에 철학자 알바 노에 교수는 ‘뇌과학의 함정’(김미선 역)이란 한국어 제목으로 번역된 그의 저서에서 “뇌는 난로가 열을 발산하듯이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뇌는 악기다. 악기는 혼자서 음악을 만들어 내거나 소리를 낼 수 없다. 연주자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음은 뇌의 현상이라는 생각은 저절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환상이다”라고 주장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그 변화는 지속적이어서 변화와 변화 사이에는 찰나의 틈도 없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모든 물리적 정신적 변화를 ‘흐름’이라는 진행태로 규정하셨다.
따라서 마음 역시 고정된 패턴의 ‘명사’가 아니라, 수많은 인연들이 서로 부단히 관계하는 유동적인 ‘동사’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마음은 있다. 그러나 마음은 공성(空性)으로 있어, 사건의 ‘흐름’이라는 ‘드러난’ 작용만으로 나타날 뿐이다. 공성은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텅 빈 것이기에, 무엇으로도 이름할 수 있고 어떤 모양으로도 그릴 수가 있게 된다. 텅 비어 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가 있는 것이다.
공성은 단순히 ‘비어 있음’이 아니라, 무엇으로든 ‘되어짐’에 신묘함이 있다. 그것이 진공묘유이다. 그래서 공성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미확정된 자유라고 한다. 바로 해방의 공간이다.
그러니 사람들아, 마음대로 하라! 마음대로 하라고 마음이라 한다. 어떤 모양으로 그릴 것인가. 성자인가, 순정한 인격인가, 축생의 편리(?)한 삶인가는 자신이 선택한다. 자신의 마음 ‘씀’에 따라 자신의 모습이 결정된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 ‘조각이란 돌 속에 이미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기왕에 탐욕과 같은 거친 의도로 굳어진 더께도, 공성을 해방시켜 들어내면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험난하고 곤고한 마음살림을 살게 마련이다.
결국, 나는 내가 만든다. 나는 나의 작품이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어떤 작품인가? 답은, 지금의 ‘나’다.
박재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