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가을에 생각나는 사람

2007-10-2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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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숙(뉴저지 한인사회보장센터 원장)

코스모스가 날씬한 몸매를 뽐내며 화사한 모습으로 나그네의 눈길을 끌 때면 스산한 가을바람과 함께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몇해 전, 이맘 때 만으로 83세 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오셨다. 문을 반쯤
만 열고 머리만 안으로 들이민채 “선생님, 나같은 사람도 시민권 딸 수 있을까요? 방금 일어난 일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이렇게 화두를 꺼내시고는 그 자리에 돌처럼 서 계셨다.나는 이렇게 권유했다. 추우신데 일단 안으로 들어오셔서 쉬었다라도 가시라고… 그리고 따끈
한 커피 한잔을 드렸더니 긴장이 풀리시는 것 같았다.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할아버지! 시민권 꼭 따고 싶으시죠?”“아무렴 그렇고 말고요” 하시면서 겸연쩍어 하셨다.
“할아버지께서 여기까지 오신 용기만 해도 벌써 50점은 따놓으셨어요. 이제 50점만 더 따시면 되는거예요”이 말에 용기를 얻으신 할아버지는 한달여간 오후 4시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내 사무실로 출근하셨다. 물론 영어 발음도 잘 안되고 기억력도 흐리셨지만 문제집이 다 닳아빠지도록 들고 다니시면서 어린애처럼 가르치는대로 열심히 따라 하셨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셨다. 같은 노인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4시만 되면 어디를 그렇게 부지런히 가느냐고 묻기에 얼떨결에 우체국에 간다고 대답했더니 우체국을 매번 반대방향으로 가느냐고 핀잔을 주면서 의아해 하더라고 하셨다.사실 우체국은 내 사무실과 반대 방향에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급히 둘러대시다 보니 실언을 하셨단다. 만일 공부하러 다닌다고 광고하고 떨어지면 창피하니까 몰래 오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고 하시면서 천진스럽게 웃으셨다.

드디어 대망의 시험날짜가 되어 이민관 앞에 앉으셨는데 이민관은 남미 계통의 젊은 아가씨였다. 처음 한 두 문제는 쉬운 것을 물었고 할아버지는 의젓하게 정답을 맞히셨다(물론 답은 모두 영어로).이번에는 단계를 조금 높여서 미국 정부 구성의 세부서를 물었다. 이 때 할아버지는 얼굴에 갑자기 경련이 일고 몸을 흔들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나는 초조하여 간이 콩알만해 졌는데 그 이민관 아가씨는 웃음을 참느라고 고개를 푹 숙인채 얼굴이 빨개져서 눈물까지 찔끔거리고 있었다.안되겠다 싶어 나는 얼른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괜찮으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시라고 다독거렸다.

할아버지는 사력을 다하여 어렵사리 답을 맞췄다.결과는 합격이었고 할아버지가 시민권 증서를 받던 그 순간은 내가 사회보장 업무를 시작하고
가장 감격스러웠던 날이었다. 그 날따라 하늘의 구름과 차창 밖의 코스모스는 더욱 아름다웠다.할아버지는 시민권을 따자마자 자신보다 훨씬 젊은 할머니를 배필로 맞아 노인아파트에서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신다. 아마도 숨겨놓은 여인이 있어서 시민권자 배우자로 초청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시민권을 따셨나 생각하니 할아버지의 로맨틱한 열정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코스모스와 함께 생각나는 할아버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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