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의 찬미

2007-10-23 (화)
크게 작게
이정일(팰리세이즈팍)

흥겨웠언 추석놀이를 지내고 보니 날씨는 성큼 늦가을에 다가섰다. 한민족 고유의 추석놀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서기 32년 신라 3대 유리왕이 왕실의 두 왕녀로 하여금 6부(部)의 부녀자를 두 패로 나누어 길쌈 겨루기를 벌려 진 편에서 이긴 편에게 잔치를 베풀고 춤과 회소(會蘇)의
노래로 함께 경축케 하니 이를 가배(嘉俳)라고 했으며 회소는 “다시 만나요” 가배는 “즐거운 놀이”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엔 ‘가위’ 혹은 ‘한가위’로 전해지니 왕실 주관에서 보편적인 민속놀이로 변천한 듯 하다. ‘가위’는 가회(嘉會)의 전음인 듯 ‘즐거운 만남’의 뜻이다. 아름답다, 즐기다의 가(嘉)는 가객(嘉客) 가례(嘉禮) 가상(嘉尙) 등 흔히 쓰이는 용어, 특히 음력 3월을 가월(嘉
月) 이라고도 한다. 24절기중 청명(淸名)과 곡우(穀雨)가 들어있는 3월, 화사한날씨, 봄비가 곡식을 자라게 대지를 촉촉히 적시고, 3월 3일 삼짓날엔 제비도 돌아오니 겨우내 집안에 움츠려 있다가 밖의 파릇한 풀을 밟으며 새로 피어나는 봄꽃도 감상하고 이같이 화사한 바깥세상을 다시 보는 계절, 그래서 ‘봄’은 보다의 명사인 듯 하다.


미루어 ‘가을’은 가을(嘉乙)에서 따온 말. 을(乙)은 첫째 ‘새 을’로 새긴다. 선조들은 옛부터 하늘을 날으는 새를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자(使者)로 여겼다. 태양엔 세 발 가진 까마귀(三足烏)가 있다고 해서 고구려는 나라의 표상으로 삼족오의 깃대를 사용했고, 발굴된 도
자기와 와기 등에도 삼족오가 많이 새겨져 있었다. 세 발의 상징은 아마도 사람이 천지와 일체(一體)를 이루려는 염원이었으리라.

이밖에 성군(聖君)과 봉황새, 칠석날의 견우직녀와 오작교, 흥부와 제비의 박씨 이야기, 까치와 설날 노래가 있다. 둘째 을(乙)은 하나(一)의 뜻이다. 셈법의 하나가 된 가없이 바르고 지극히 큰 하나이다(至正至大無外), 유한한 인간의 능력으로 무한을 가늠할 수 없기에 다만 글씨의 표현을 빌려 정(正)이라고 하고 대(大)라고 한다. 정(正)은 하나를 지켜서 멈춘다(一十止二正), 천(天)은 큰 하나이다(一十大二天), 태을(太乙), 태일(太一)이라고도 한다.

‘을’은 만유를 포괄하는 하늘의 정도(正道)요, 대도(大道)이고, 만유 창조의 근본인 혼돈한 원기, 즉 기운이다. 서구의 로고스(logos) 창조가 아닌 음양과 오행(五行)의 운행으로 만유가 생성 변화하는 역(易)의 개념인 즉 Being에 대한 Becoming이다.

태을을 한글로 옮기면 ‘한을’, ‘하늘’이요, 태일은 그대로 ‘하나’ 줄여서 ‘한’이다. 말 없이, 쉼 없이 거저(居諸) 만유를 생성화육하는 공덕에 감사하여 하늘님,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고 존칭한다. 이처럼 하나는 온전한 하나(全一)이다. 이에 비해 이(二)는 다를 이(異)이다. 서
로 대립하고 부정하는 이분(二分)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二’는 대립이 아닌 태극(太極)의 음과 양이 운행하여 만유의 생성변화를 돕는 양의(兩儀)로 파악했다. 즉 ‘둘’로 한 쌍을 이루는 음과 양, 하늘과 땅, 마치 동전의 앞과 뒤같은 관계, 그래서 우리 말에는 나들이, 미닫이, 옹기종
기, 흥청망청 등의 합성어가 많이 있다.

거저(居諸)란 일거월저(日居月諸)의 준말, 곧 해와 달은 댓가 없이 친소(親疏)의 가림 없이 스스로 그러함의 바르고 큰 공덕을 기리어 감사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가을은 거저 주는 하늘을 찬미하여 경축하는 계절이라 하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