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노대통령이 홀대받은 이유는?

2007-10-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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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우여곡절 끝에 남북정상회담이 끝났다. 국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정상회담이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감동을 주지 못한 회담인 것 같다. 정상회담의 성과에 관해서도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남북의 평화체제 추진, 군축 추진, 경협문제를 큰 성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실효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평화체제와 군축 추진은 미국의 의사에 따라 결정될 사안이며 경제협력은 주로 남한의 돈을 북한에 지원하는 것으로 신뢰 구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8개항은 좥남북관계 발전 평화선언좦이라는 말 그대로 선언인 것이다. 이 선언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문제는 앞으로 별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 합의내용은 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이전에 이미 하기로 했던 내용이므로 정상회담에서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정상회담에서 무언가는 주고 받아야 했으니 이런 합의를 발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도 이번 회담에서 관심을 끈 것은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홀대이다. 남한은 정상회담을 위해 무척 공을 들였다. 북한으로서도 남한은 결코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될 나라이다. 그런데 노대통령에 대한 대접은 기대 이하의 섭섭한 대접이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대접이었다.우선 7년 전 DJ의 방북과 비교해 보자. 김정일은 순안비행장에서 DJ를 마중했다. 활짝 웃는 얼굴로 DJ를 얼싸안고 마중한 김정일은 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자동차를 단 둘이 타고 가면서 밀담을 나누었다. DJ를 환영하는 만찬장에 나온 김정일은 장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띄웠고 답례 만찬에서는 포도주를 10잔이나 마시고 농담을 하는 등 분위기를 돋구었다.

그런데 이번 노대통령의 방북 때는 비행장에 나가기는 커녕 환영식장인 4.15 문화회관 광장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악수를 나누고 짧은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환영식장에 먼저 나온 김정일은 노대통령이 도착하여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오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기다리고만 있었다. 첫 날 열린 환영만찬과 둘째날의 답례 만찬에도 김정일은 참석하지 않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상대했다. 아리랑 공연을 관람할 때도 김정일은 동석하지 않았다.

북한은 외국의 원수가 방문했을 때 상대에 따라 의전상 철저한 차등을 둔다. 북한의 의전 수준에서 최고 예우는 김정일이 공항에서 직접 영접하고 도착 당일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을 방문하며 만찬연회에 함께 참석한다. 지난 2000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2001년 장쩌민 중국 주석의 방북, 2005년의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방북 때 이런 절차를 밟았다. DJ의 방북 때도 이와 같았다. 특히 울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방북했을 때는 적대국의 장관급인데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백화원 영빈관을 방문했고 집단체조 관람과 연회에 동석했다. 이에 비해 약소국가의 원수들에 대해서는 직접 공항 마중, 만찬, 회담을 하지 않고 예방만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대통령에 대해서는 상대나 하대도 아니고 중간 대우를 한 셈이다.

그러면 왜 노대통령을 이렇게 대우했을까. 건강 악화 때문에? 김정일은 스스로 건강이 나쁘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는 상대를 파악하여 의도적으로 다루는데 천재적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필시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첫째로 이 정상회담이 노대통령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김정일로서는 그 요청을 들어준 일종의 시혜라고 본다면 그런 대접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정상회담이 보통 대통령의 권력이 강한 임기 초에 있을 경우 임기중 영향력을 고려해 후대하겠지만 퇴임 직전의 대통령을 지나치게 환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셋째는 한국 사정을 실시간으로 손금 보듯이 알고 있는 김정일이 국내에서 조차 정치적 계륵이 되어있는 노대통령을 대단하게 대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넷째, 노대통령과 자신을 비교해 볼 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특히 좌경사상을 가진 노대통령은 좌파의 수장인 자기와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어쨌든 김정일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노대통령과 격을 달리 함으로써 최소한 북한주민들에게 자신이 북한 뿐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지도자라는 인식을 심으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노대통령이 만찬장에 참석하지도 않은 김정일의 만수무강 축배를 선창하고 김일성 장군 카드섹션에 기립박수한 것은 본의와는 다르더라도 이러한 김정일의 의도에 일조를 한 셈이다. 앞으로 어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노대통령과 같은 정상회담을 갖는다면 이와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되고
김정일을 격상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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