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잎과 같은 사람들

2007-10-0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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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가을 잎이라고 해서 다 단풍은 아니다. 공기가 나쁜 곳에서의 가을 잎은 단풍이 되기 전에 누런 된장색깔을 띠고 시든다. 그것은 단풍이 아니다. 찌들면서 시든 잎이다. 신선한 환경을 조성하며 산 사람들의 가을 인생은 나이가 들어도 아름답다.

가을이 왔다. 단풍은 공기가 맑은 곳일수록 더 붉고 더 노란 색깔을 휘날리며 자랑한다. 멀리서 보는 가을의 단풍은 아름답기 그지 없지만 그 아름다운 단풍잎을 주워서 보면 그 표면이 심상치가 않다. 멀리서 보이는 그 붉은 색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더니 손에 든 잎의 표면을 보니 검은 점이 여러 군데다. 찢기거나 구멍이 난 것도 있다. 한 철을 살다 가는 이 잎에도 어려움과 아픔이 많았다는 표적이다. 아픔과 서러움과 한숨이 섞이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는 저 표정들.


가을이다. 참 많이 참았다. 부부 사이에서나, 친구관계나, 혹은 조직의 일원으로서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그 불편이 큰 소리로 번지고 소란스러울까 염려되어 참았다. 참았더니 조용하고, 조용하니 험악해지던 분위기에 평화의 발걸음이 등을 보이며 가다가 되돌아 왔다. 그랬다. 조용한 삶은 참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는 일이 생활인 채 살아오면서도 말없이 단풍이 된 가을 잎에서 회초리 소리를 듣는다.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복은 평화’라는 가르침을 듣는다. 행복하고 싶었다. 사람이면 누구든지 원하는 것이 행복이고 내 것이 될런지, 아니 될런지 아무도 몰라도 들여다 보면 지천으로 깔린 것이 행복이다. 다만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따름이다.

시행하기가 쉽지 않은 간단한 원칙. 첫째는 낮아지는 것이고 둘째는 나누면서 산다는 것이다. 고향집이 바라보이는 작은 언덕길 사과나무 밑에서 잠시 앉아 쉬던 뉴톤이 떨어지는 사과 한 개를 보고 발견했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은 아래로 가도록 만드신 것이다. 인간은 고달프다. 높아지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높은 곳을 오르려니 고달프다. 서있는 것보다는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편하고, 의자에 앉아있기 보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 더 편
하고, 바닥에 앉아있기 보다는 누워있는 것이 더더욱 편하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이 꼿꼿하게 서서 남을 내려다보는 사람 보다 행복하다.또한 나누면서 산다면 행복은 언제나 내게 온다. 좋은 말을 나누고, 의견을 나누고, 불편한 내용은 모두 다 내 탓으로 돌리면서 상대를 높이고 공경한다면 행복은 저절로 온다. 어려운 일이다. 알기는 아는데 힘이 드는 일이다.

종교에서 가르치는 겸손 이상으로 낮아지는 일, 정상의 산봉우리는 홀로 우뚝 서 있어 모진 바람과 추위에 시달리지만 그 산의 몸체는 아래로 허리를 내려 어려움을 나누어 겪는다.허리를 많이 내린 산일수록 산 밑이 넓어져 많은 것을 품고 이용가치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평지의 흙을 쌓아올려 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흘러내린 산 흙이 평지를 만들고 농토를
만든다. 가을이 간다. 잎이 진다. 가을날의 아름다운 잎새가 되려거든 고난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가슴 속으로 깊이 간직하라. 시달림을 거부하지 마라. 천둥, 번개, 비바람이 청명한 하늘을 만든다. 성장을 바란다면 빗물이 되거라. 마른 땅은 갈라지기만 한다.

청명한 햇빛과 서글픈 가을빛을 옆구리에 끼고 가을이 또 한번 왔다 간다. 사람들이 악수 한 번 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기만 하는 적막한 도시에서 잎새를 떨구며 서 있는 나무들, 그들은 지나가는 바람을 원망하거나 손으로 막지 않고 오히려 바람 때문에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어느 방향을 잡고 가더라도 피해갈 수 없는 어두운 삶에서 스스로 불을 밝히며 절룩거리지 않고 가는 사람들, 사는 동안에는 아무런 주제가 없지만 살고 나면 주제가 생기는 인생, 수확의 내용에 따라서 주제가 성립되는 가을이다. 한 철을 살다 가는 낯선 이국의 가을, 언제인가는 떨어져야 할 터인데 어떤 색을 얼굴에 새기고 떨어질 것인가... 비석의 이름들이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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