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 단상

2007-10-03 (수)
크게 작게
정영휘(언론인)

몇 십년 만의 찜통 더위, 밤잠을 설치게 하던 열대야, 장마 후에 쏟아진 더 큰 빗줄기 등으로 인해 올 여름은 몹시도 어려웠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어김없이 가을의 문턱에 와 있음을 알린다.

가을에는 단풍의 아름다움 보다 조락의 슬픔이 더하다. 존재하던 것들이 제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며 만유(萬有)의 무상을 알아차리는 서글픔, 가을을 느끼는 우리의 감정은 이런 것인가 보다.그래서 가을을 이별의 계절이라 한다. 토실토실 익은 열매가 이른 봄부터 꽃을 틔워 저를 영글게 해 준 나뭇가지와 이별을 고하고, 삼짓날에 왔던 제비는 장천을 날아 멀리 남쪽으로 떠나간다. 나뭇잎은 새봄에 어김없이 제 자리를 찾아 그 여린 생명이 새싹으로 다시 태어나고, 제비는 삼월이 오면 옛 집 처마 밑 둥지를 다시 찾지만 사람은 그렇지가 못하다.


인간의 이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승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영원한 슬픔의 이별과, 이 세상에서 같은 땅을 밟으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헤어짐이 있다. 죽음이 갈라놓은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을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의 변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세상은 변하고 새로워져야 겠으나 마음만은 변치 말고 오래 간직했으면 좋겠다.
가을은 사랑의 계절이기도 하다. 사랑은 이별을 통해서 참다운 의미를 드러낸다고 했다. 부재(不在)를 통해서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사랑이므로...

그렇다면 가을 만큼 사랑을 알 수 있는 계절이 어디 또 있겠는가. 결실은 초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도 있다. 가을에는 벼나 사과만 익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익는다. 문득 불어오는 소슬바람을 만나면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비어있는 옆자리를 챙기게 된다. 사랑이 익는 계절, 가을에는 좋은 인연을 찾아 먼 길을 떠나고 싶고 사랑의 설렘으로 긴 밤을 새기도 한다.드러난 살갗을 익힐 것 같던 뙤약볕, 먹구름 속의 장대비와 휘몰아치던 태풍을 이기고 넙죽이 자란 나뭇잎이 제각기 다른 빛깔과 모습으로 가을을 준비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어느 사이 우리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럴 때면 인간도 다른 동물과 같이 자연의 일부임을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하고 자책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가을은 사람을 외롭게 한다. 잎이 지고 철새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 옷깃에 스며드는 소슬한 바람결을 느끼며 우리는 공허와 고독에 젖는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사회적 동물이면서 동시에 홀로일 수밖에 없는 단독자(單獨者)이기에 그렇다. 홀로 왔다 홀로 가는 여정에서 때로는 고독을 씹으며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가을은 사람도 나무 열매처럼 익게 만드는가 보다.

일찍 저무는 가을밤에 듣는 귀뚜라미 소리는 객창의 외로움을 더하게 하지만 그만큼 나그네를 성숙케도 한다.가을의 차가운 별빛은 사람들을 깊은 사색에 빠져들게 한다. 내 가난한 뜨락에 떨어지는 씨앗들을 모아 땅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그동안 살아오며 얻어낸 것들을 하나씩 털어내어 원초의 순수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바로 가을이다.언젠가 다가올 인생의 황혼을 생각하며, 시간의 흐름이 저절로 원숙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성과 소멸의 우주적 이치를 깨닫는 시기도 일년 중 가을이 적격이다.

그렇다. 가을은 분명 소멸과 떠남의 계절만은 아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씨앗을 챙기고 새봄을 위하여 동면을 준비하는 때이다.저만치 가을이 더 물들고 단풍 색깔이 짙어지면 홀로라도 산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가을이 물든 가을산에서 가을 사내가 되고 싶다.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기며…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