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신비에 차 있는 인간!

2007-09-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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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다” ‘있다’와 ‘없다’의 차이다. 과연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영원히 뛰어 넘지를 못할까.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한계란 또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가늠하고 정의할 수 있을까.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인간이란 존재를 “유전자에 의해 미리 프로그램 된 대로 먹고 살고 사랑하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라 정의했다. 조금은 전문 용어 같지만 그런대로 이해할 만하다. “유전자에 의해 미리 프로그램 된 존재” 그렇다면 인간이란 컴퓨터 칩에 의해 미리 프로그램 된 로버트와 뭐가 다를 게 있을까.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인간을 혹은 인간성을 ‘리비도’란 본능에서 찾았다. ‘리비도’는 인간이 가진 성적 본능으로 인간은 리비도에서 힘을 얻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는 “리비도에 의해 힘을 얻는 본능은 최대 만족을 추구하므로 인간성은 성적이고 본능적”이라 했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최대 본능들이다. 먹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미국에는 나무들이 많다. 동네에도 많고 산에도 많다. 나무도 별별 나무가 다 있다. 아침 출근길에나 저녁 퇴근길에 만나는 동네의 나무들. 혹은 산행 중 만나는 깊은 산속의 나무들. 그 나무들을 보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나무와 인간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인간도 숨을 쉬고 있고 나무도 숨을 쉬고 있다. 나무는 나무의 한계를 알고 있을까”. 나무와 인간은 다른 점이 있다. 나무는 움직일 수 없고 인간은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나무도 움직인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게 천천히 자람이 나무의 움직임이다. 뉴욕에서 제일 가까운 산 중 하나인 베어 마운틴에 가보면 나무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트레일 중 가장 쉽게 오르고 내릴 수 있는 화이트 코스를 올라가다 보면 나무뿌리의 움직여짐과 생명력을 본다.

바위 속에 뿌리를 내리며 바위를 파고들어가는 나무들. 물을 찾아 뻗어가는 뿌리들을 인간들이 지나다니며 밟아 생체로 드러나 있는 곳들도 많다. 너무 많이 밟고 지나다녀 아예 윤이 날 정도로 뿌리들이 반질반질하다. 뿌리들은 죽어 있지 않다. 수십 년 수백 년을 지나오며 뻗어진 뿌리 뻗음을 통한 생명력은 살아보려는 인간 의지의 생명력과 다를 바 없다.
장자가 말한 “나비가 내가 되고 내가 나비가 되는” 바뀜의 꿈은 가능한가. 그렇다면 “나무가 내가 되고 내가 나무가 되는” 바뀜의 상황은 한계 극복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피조물이라는 입장에서는 나무나 나비나 인간은 같다. 다른 자연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한계는 인간이 자연이 아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데 있지 않을까.

기독교사상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본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인해 죄가 인간 속에 들어왔음을 설명한다. 본래는 선한 바탕의 인간이었으나 사탄의 유혹으로 죄가 인간의 마음과 육신 속에 들어와 인간은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구세주가 나타나 인간의 죄를 구속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게 기독교사상이다.
그 구세주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100% 신이요 100% 인간이라 기독교사상은 말한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을 구속하려 이 땅에 내려왔다고 말한다. 그런 ‘예수의 하느님 됨과 인간됨’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이며 또한 인간의 한계와 극복을 찾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00% 하느님은 성성(聖性)이요, 100% 인간은 속성(俗性)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절규한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수반한 부르짖음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소망은 절망과 흑암의 상징인 죽음을 이긴다는 것이다. 인간 한계의 극복이다.

인간 스스로는 인간의 한계, 곧 죽음을 뛰어넘지 못한다. 수동적으로 던져진 존재이기에 그렇다. 인간은 자연과 하늘과 땅의 도움이 있어야 산다. 그러나 그 삶엔 한계가 있다. 유전자에 의해 미리 프로그램이 되든지, 성적인 본능에 의해 힘을 얻든, 인간은 다른 동물과, 자연과의 차이가 있음엔 분명하다. 인간도 숨을 쉬고 나무도 숨을 쉬지만 인간은 나무가, 나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안에 하나는 될 수 있다. 하느님의 형상을 쫓고 있는 인간의 형상. 예수의 절규 속에 인간의 참담함이 담겨 있지만 하느님으로 다시 부활한다. 신비에 차 있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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