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여성을 예찬함

2007-04-3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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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목사/수필가)

이조 말엽, 개화운동가 중 한 사람인 유길준(1856~1914)은 최초로 서양여자에 대한 인상기를 썼던 사람이다. ‘서유견문(西遊見聞)’을 볼 것 같으면 필자는 붓을 들고 한동안 굳어 있었다.

‘호악(好惡)의 비평(批評)은 불하(不下)하노니…” 유길준은 서양여자가 아닌 바로 한국여자 앞에 얼어있었던 것이다. 섣불리 서양여자가 좋더라고 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런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긴 그 무렵(1890년대)의 한국 여자들이란 흙속에 묻힌 구슬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시집살이 어떻더뇨? 고초당초 맵습디다”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여자의 지위는 나락으로 떨어져만 갔던 것이다. 고려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여왕들을 보고 “암돼지가 껑충껑충 뛴다”라고 빈정댔었다. 그러나 정작 신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왕들은 퍽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김유신과 같은 명장을 거느리고 있었고, 진덕여왕 옆에도 역시 김유신과 함께 김춘추가 보좌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들의 시대는 신라의 상대 말(上代 末)로서 고구려, 백제와의 각축전이 한창이었다. 이 두 나라는 신라가 간신히 차지한 한강변과 서해의 통로를 빼앗으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여왕들은 그 미증유의 국란들을 거뜬히 넘겼던 것이다. 나라를 보존하기 조차 어려운 시기에 여왕들은 능란한 외교술을 펼쳐가며 신라통일의 기초를 닦아놓았던 것이다. 진성여왕대에 이르러 실정(失政)과 음란으로 선왕의 덕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그에게도 향가를 집대성하는 업적이 없지 않았다.임진왜란 시절의 한국 여인상은 더욱 돋보인다. 어떤 기록(東國新續 三綱行實)을 보면 왜란중 삼강(父爲子綱, 君爲臣綱, 夫爲婦綱)의 행실이 뛰어난 사람들은 효자 67건, 충신 11건, 열녀 356건에 달한다. 여기서 열녀의 수는 효자나 충신들 보다 다섯배나 더 많다. 이들은 일본군 앞에서 정절을 지킨 부녀들이다.

미국 유학을 갔던 최초의 여성도 보통은 아니었다. 김점동(일명 김 에스더)은 1896년 볼티모어에 있는 한 의과대학에서 보란듯이 우등을 했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온갖 고생을 참고 견디며 고학을 하면서 더구나 남편의 뒷바라지까지 해가면서 끝내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한국여성들은 어깨가 으쓱해질 것이며 만인의 예찬을 받을만 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성의 우수성은 여성이 남성화하는 풍조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얼마나 남성의 일을 맡아서 잘 해 나가느냐?”가 여성의 우위성을 시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이 더욱 여성다울 때, 그런 정신적 매력을 보여줄 때 그는 비로소 예찬받을 여자로 돋보이게 될 것이다.

이제 5월이다. 5월 중 가장 기리며 축하할 대상은 어머니들이며,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여성들인 것이다. 가장 개화됐다는 미국에 와서 살면서도 자기 인생은 깡그리 접어둔채 오로지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살면서도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가족들의 눈치를 봐가면서 살아야 하는 여성이 있다면 차제에 그같은 여성들을 남성들이 앞장서서 존대하며 칭송하는 미덕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남성들 또한 멋진 남자 대우를 받을터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세상이 될 것으로 기대해 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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