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서운 것들

2007-04-1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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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길(수필가)

옛날에 보았던 아이들 책 중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라는 글이 있었다. 동구밖에 아이들이 모여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 한 아이가 의문을 제기했다. 호랑이가 무섭다. 귀신이다. 원자탄이 제일 무섭다. 아이들의 의견은 여러가지로 분분했다. 종내는 길을 지나는 행인에게 묻기로 했다. 행인들 중에 마지막 차례가 된 노인의 대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망각이라 했다. 나이가 점점 들고 몸과 마음이 쇠락해져 지난 날의 추억이나 기억들을 하나씩 잊어가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라 했다.

오늘의 사는 우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른들은 자기 체험에서 오는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을 것이다. 전쟁을 체험한 이들은 총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 설 것이고, 사업에 실패한 이들은 부도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내려앉을 것이며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을 때 뒤따라 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것이다.전쟁이나 자연재해로 폐허가 된 도시의 소식을 접할 때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 인간들은 왜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살아야 하는가. 예고되었던 커다란 재난을 왜 사전에 막지 못했을까, 하는 답답한 마음이 든다.


가난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못 받고 자기 개발의 기회를 잃어버린 이들이나 돈 때문에 혈육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음으로 보낸 이들은 세상의 인심과 돈이 원망스러울 것이다.우리는 바쁜 일상생활을 매일 되풀이하다 보면 생활의 타성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든다. 피곤하게 일을 해서 집세 내고 생활하고 카드 빚 갚으면 다시 생활은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 이런 생
활 속에서는 여가도, 문화생활도 찾을 수 없는 생활의 무감각에 빠져든다.
생활의 무감각이 오래 지속되면 정신적 무감각이 동반된다. 세상이 온통 잘못 되어있는데 조금 잘못한다고 무슨 대수냐로 시작되면 양심은 무디어지고 여러가지 범죄에 무감각해질 것이다.

폭력과 도둑질을 재미로 하고, 아이들이 총기를 들고 서슴없이 사람에게 난사한다면 세상은 무서운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생활과 정신의 무감각은 희망과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자포자기하든지 세상의 질서에 반항하려 들런지도 모른다.사랑이건 미움이건 지나치게 집착하면 무섭게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사랑은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지 소유의 욕심이 아니다. 누구를 미워하다 보면 자신이 더 괴로움을 당한다.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집착도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불치의 병에 걸려 희망을 잃고 죽음의 그림자가 매일 조금씩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이는 죽는다는 것이 무척 두려울 것이다. 죽음이 남의 것으로 바라볼 때는 그저 자연스럽게 계절을 맞듯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죽음의 주인공이 내가 될 때는, 세상에 애착을 많이 남겨둔 사람들일수록 죽음은 절망과 공포의 대상일 것이다.

죽음의 공포도 마음의 무감각도 개별적인 것으로 어떤 이들은 쉽게 극복할 수도 있으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의 마음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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