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본의 위안부 강제동원 폭로운동, 이렇게 시작됐다

2007-04-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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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수(전 플러싱한인회장)

1990년 초 플러싱의 한 우중충한 지하실에서 10여명의 인사가 모여 정신대 대책운동의 발대식을 가졌다. 체리 애비뉴에 있는 곽상희 시인의 전 해바라기 유치원 지하실이 그곳이었다.당시에 한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필자를 비롯해 김영호 목사, 곽상희 시인, 박근순 여사, 김용환 변호사, 김용삼 회장, 김명신 장로, 한문수 목사, 민병갑 교수 부부 등이었던 걸고 기억된다.

당시 본국 정부는 일본정부 눈치 보느라 정신대 소리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고, 일본정부는 민주공화당 김종필씨와 일제 국가보상협정에 끼워서 일괄적으로 이미 해결한 사건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미국정부 역시 일본과의 관계를 우선해서 잊혀진 과거를 재거론하는 것을 씁쓸해하는 상황이었다.‘정신대’라는 이름의 일본군 강제위안부의 존재는 당시만 해도 가끔 피해자의 증언은 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그 실체 조차도 인정하지 않던 상태였다.


일본은 아직도 그 역사적 만행에 대해서 ‘인정 안한다’는 등 ‘이미 보상을 다했다’‘에미가 딸을 팔았다’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망언을 하고 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나마 알고 있는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정신대는 일제시대를 살아간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비인간적인 만행이었다.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라는 미명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아시아 점령지역 내의 젊은 여성 30만명을 강제로 징발해서 전선에 배치된 일본군들에게 일본 황제의 하사품으로 제공한 천인공로할 사건이다.

그 중에 80%가 한국 여성이었다.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면 여성과 아이들이 우선 먼저 희생당하게 되는 것이라더니,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2007년 이즈음 다시금 세계언론의 주목을 받게된 그 정신대 진상 폭로운동은 앞에 기술한 대로 본국이 아니라 재일동포가 아니라 바로 뉴욕한인동포들이 시작했던 것이다.당시 상황은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시도하던 때였다. 바로 이 기회를 잡아서 일본의 시도를 저지하고 역사적 만행을 폭로하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음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정신대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받게 하고자 하는 목표로 이 운동은 시작됐다.

그런데, 플래카드를 손으로 쓰는 등 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조촐한 발대식을 마치자 당시 이름있는 목사 한 분이 암울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발언을 했다. “누가 와달라고 해서 참석은 했지만 막막하기만 합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이런 일을 왜 우리가 해아합니까? 해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데…”하면서 난색을 보였다.필자는 당시 집사에 불과했지만 떨리는 가슴을 참지 못하고 목사에게 감히 설교를 시작했다.

“목사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 다윗 소년과 거인 골리앗 장군간의 싸움에서 어느 누구도 다윗이 이길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린 다윗이 이겼습니다. 우리에게는 불의와 싸워서 정의가 이긴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다윗처럼 우리는 힘이 없어 보이지만 여러명의 다윗이 힘을 합쳐서 추진하면 안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즉각 설교를 끝내고 나니 그 목사는 자리를 뜨고 없었다. 직분과 상관 없이 믿음있는 사람들이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미미하게 시작된 정신대 문제를 15년이 지난 이즈음 젊은 후배들이 바통을 이어서 잊혀질 뻔한 역사적 만행을 드러내어 세계적 이슈로 부각시킨 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다.일제 종군위안부 만행은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 사건과 버금가는, 잊어서는 안될 20세기의 비극적 사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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