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아, 태환이 가진 열쇠

2007-04-0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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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지난 25년간 미국을 바꾼 25가지’라는 제목이다. 여기에 따르면 인종 다양화, 여성 권익신장, 평균 수명 연장, 세계화, 지구 온난화, 동성 결혼 합법화, 테러 위협, 금연법, 비만, 기술 혁명 등이 10위에 올랐다. 열거된 사안들을 살펴보면 당연한 일들이 잠자고
있다가 하나씩 문을 열고 나온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한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는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명문화 된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된 것도 아니면서 생각하는 바탕에 깔려서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인종 다양화가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알면서도 ‘인종에는 우열이 있다’는 막연한 고정관념 때문에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음을 말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끈질기게 외곬으로만 흐르면서 굳어진 생각이 드디어 고른 숨결을 찾게 된다. 어떤 계기란 여덟 명 중의 한 명이 노령이란 통계가 나온다든지, 지구의 기후 변동이 심하게 된다든지, 911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서 노령자도 시민의 구성원이고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생활을 해야 하겠다. 테러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됨을 말한다.‘올림픽은 참가하는 데 뜻이 있다’ 왜 이런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을까. 한국이 올림픽에서 바람직한 성과를 올리지 못함을 자위하는 뜻이 담긴 이 말을 대부분이 긍정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바탕에는 서구인은 체격이 크고 힘이 세다. 따라서 각 방면의 체능이 우수하다. 여기에
맞서기에 우리는 너무 빈약하다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의 약한 도전정신이나 미숙한 체력 향상 훈련을 탓하지 않음이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생각의 견고한 담을 허문 김연아, 박태환의 출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김연아는 2007 국제빙상연맹(ISU) 세계 피겨선수권대회 여자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71.95점(기술점수 41.49, 프로그램 구성 점수 30.46)으로 우승 후보로 기대되었다가 동메달을 땄다.박태환 선수는 멜버른에서 열린 세계 수영선수권대회에서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와 같은 두 선수 성적은 우리들의 막연하면서 틀에 갇힌 생각의 물꼬를 텄다. 이들의 모습을 보거나 이들의 느낌을 글로 읽으면서 느낀 점이 있다. 이들은 서구인에 대한 패배의식이 전연 없다. 체격·체력 문제에 구애됨이 없이 그들과 같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집중과외를 받았다.이들이 체격에 자신감을 갖는 것은 국력이 뒷받침을 한 영양분 제공을 들 수 있다. 또 ‘경제력이 메달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의 경제 사정이 이들을 훈련하는데 도움을 주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들은 한국이 만든 체육계의 명품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보인 도전 정신이다. 태환은 ‘오늘밤 12시까지만 우승의 기쁨을 즐기고, 다음 경기 준비할게요’라고 말하였다. 연아는 외국인 코치가 연습시간이 너무 많다고 하여도 ‘괜찮다. 할 수 있다’고 연습을 계속하였단다.두 선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깨뜨리고 밝은 미래로 안내하였다. 피겨 스케이팅이나 수영은 서구인과 겨룰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소위 선진국형 종목이라는 생각은 옳은 것이 아니다. 체격이나 체능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며 DNA에 관계 된다. 따라서 꿈은 가질 수 있지만 어떤 제한이 있다는 생각도 시정해야 한다.

결국, 연아와 태환이 우리의 미래에 파란불을 켰다. 그것은 첫째, 꿈을 가지고 둘째, 도전하고 셋째, 과학적인 훈련을 쌓는다면 바라는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오직 체육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방면에도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이다.어린 그들의 늠름한 모습, 여유로운 표정, 성과를 예사롭게 다루는 모습, 다음 경기를 위한 준비성 등을 보면서 한국의 미래가 밝음을 상징하는 듯하였다. 두 선수가 가지고 있는 열쇠의 귀중함을 오래 기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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