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문의 날과 서재필

2007-04-0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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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황석(가칭 서재필 추모회 간사/약사)

4월 7일은 51회 신문의 날이다. 신문이 얼마나 귀하기에 신문의 날까지 제정했을까? 쌓이고 널린 게 신문이기 때문이다. 한국식품점 입구에는 공짜로 가져가라는 일간지, 주간지들이 수북하게 쌓인다. 인터넷만 두드리면 일간지들이 줄줄이 나온다.

신문의 날을 제정했던 1957년은 안 그랬다.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귀했다. 시골에서는 면장을 지낸 부잣집이나 신문을 구독했다. 마을에 사는 중학생이 배달했다. 학교가 끝나면 시장통에 들려 신문을 찾았다. 귀가하는 10리길을 걸으면서 신문을 읽는 맛이 대단했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뉴스, 연재만화, 연재소설은 요즘 TV 드라마보다도 더 재미 있었다.서울도 중산층이나 돼야 신문을 구독했다. 새벽부터 신문 오기를 기다리던 남편은 ‘샵’하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이불을 박차고 뛰어나가 신문을 가져다 읽었다. 가난뱅이들은 동아일보가 있는 광화문까지 걸어갔다. 게시판에 부착된 석간신문을 읽으려고 몰려든 공짜 독자들로 동아일보사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시절 경향신문, 동아일보는 민중의 입이요, 귀요, 독재자에게는 칼보다 무서운 필봉이었다.


민주화 시절에도 그렇거든 신문이 최초로 탄생했던 구한말 시절은 어땠을까? ‘신문의 날’ 4월 7일은 서재필 박사가 ‘독립신문’을 창간한 날이다. 1866년 구한말에 출생한 서재필은 16세에 장원 급제하고 17세에 일본에 유학한 개혁의 선구자다. 18세에 주도한 갑오경장이 3일 천하로 끝나자 19세에 미국으로 망명한다. 10년만에 의학박사가 됐지만 보장된 미국 상류사회의 축복을 거절하고 망해가는 조국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발간한다. 반만년 역사상 최초의 신문이다. 그게 1896년 4월 7일이다.

독립신문은 민족운동의 요람지였다. ‘독립신문’을 만든 서재필은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를 끌어들여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하여 ‘독립회관’을 만들고 대국사신(大國使臣)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신문’을 브리핑해 본다. 시장경제가 허락된 사유기업이다. 정기 구독과 가두판매를 하고 구독료와 광고료도 받았다. 제물포,원산, 부산,파주, 송도, 평양, 수원, 강화에 분국(分局)을 두고 상해에는 해외지사(?)를 설치했다. 한글전용 구독료 저렴, 300부로 시작하여 전성기에는 3,000부까지 발행했다. 111년 전 상투에 갓 쓰고 다니던 구한말에 3,000부는 지금의 뉴욕타임스에 비길만한 업적이다.

지금은 신문 전성시대다. 고층빌딩 사옥에서 100만부를 찍어내는 일간지가 수두룩하다. TV 매스컴으로 황금알을 거둬들이는 신문 재벌도 있다. 청와대 출입기자 생활 몇 년만 하면 아파트를 산다고 한다. 기자 경험이 있는 조카와의 대화. “지금은 신문기자 되기가 고시 합격보다 더 어렵데요” “그래, 지하에 계신 서재필 박사가 알면 기뻐하시겠네” “천만에요! 아주 슬퍼하실 거예요. 의사직을 버리고 독립신문을 만들었던 서재필 박사가 지금 살아 계시다면 그 양반은 신문사를 버리고 의사로 복귀하실 걸요”신문의 날이 다가오니 서재필 박사가 그리워진다. 독립신문을 만들었던 송재 서재필 박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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