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래도 오늘 사과나무를

2007-03-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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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업(필라델피아)

이민 초기, 어쩌면 춥고 배 고프고, 바쁜 계절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롭고 쓸쓸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산다는 것이 참 힘들고 답답했다.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지기도 했고 온갖 것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갖기도 했다.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과 분노에 휩싸이고 했다. 그러다가도 환경이 좋은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와 패배감도 아울러 지니게 되기도 했다.

변명도 많았고 핑계도 많았다. 하루 하루가 한 마디로 괴로웠다.그러나 어느 때는 나도 모르게 희망에 들뜨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무엇이나 이 축복의 땅에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슴에 퍼지는 희열을 겪기도 했다. 하는 일마다 신이 나서 정신없이 돌입한 적도 있다. 자신이 생기면 모든 것이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경험도 했다. 때때로 쉬는 날에는 뉴욕타임스를 사 가지고 공원 벤치에 앉아 사전을 뒤지면서 읽기도 했고 회원국 국기가
휘날리는 유엔본부 앞에 서서 사진도 찍고 본부 구내 우체국에 들러서 서울 가족에게 그림엽서도 보냈다.갑자기 세상이 조그맣게 졸아들면서 한없이 커져가는 나 자신을 확인하면서 산다는 것이 아예 하찮게 여겨지며 나의 이민생활은 지쳐져 가고 있었다.


돌이켜 보건대 어려웠던 시절은 그저 괴로운 때만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때처럼 내가 이 나라에서의 인생에 희망에 부풀고 사는 것이 자신이 있고, 세상을 향해 당당했던 적도 없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결국 삶은 어디에 살던 절망과 희망과 좌절과 자신감, 괴로움과 뿌듯함으로 엮어지는 천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긴급진단 - 설 땅 잃어가는 불법체류자들’ 기사를 가슴아프게 읽었다. 한인 불법체류자가 약 36만에서 40만명, 미주 한인의 18%, 10년 사이에 10배가 폭증되었다는 통계자료를 보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의 생활상이 떠오른다.어차피 이민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에 온 이상 시간이 걸리겠으나 각종 이민법률이 의회에 나타나는 것을 보아 신분 문제는 해결이 될 것으로 본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두 흐름이 한꺼번에 담고 방황하는 때가 있게 된다.

말하자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주는 어떤 결정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나에게도 그러한 힘이 있었다. 사실 많은 그러한 힘이 없었다면 오늘 나는 사람 구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나이를 먹어 되돌아 보면 참 많은 고마운 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사람이 아닌 다른 것들 속에서 힘의 원천을 찾는다면 하나는 알렉산드로 세르게비치 푸시킨의 시 한 구절,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이 러시아인의 시 한 구절이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게 하고, 위안을 안겨주었다.그리고 네덜란드 어느 철학자가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는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라고 한 이 한마디는 오늘을 살면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다. 한 편의 시와 철학자의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온 생애를 짙은 삶의 의지로 채색하고 있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절의 여명이 밝아오는 이른 봄, 이 땅 어디에선가 내일의 미국 시민 될 꿈을 안고 사과나무를 심으며 분투하는 미지의 동료들에게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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