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성(聖)속(俗)이 함께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

2007-03-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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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한 평생을 깨끗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신이 아닌 이상 사람의 몸을 갖고 태어난 이상, 순전히 100%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다. 사람이란 본래 몸과 마음을 갖고 형성된다. 마음을 아무리 깨끗하게 하더라도 몸은 그렇지 못하다. 몸 안에는 변이 있고 각종 나쁜 병균들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몸에는 나쁜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다. 그걸 세포라고 하나. 수십, 수백억 개가 넘는 세포로 구성된 몸은 한 마디로 크게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는 곳이 된다. 꼭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는 것. 필요한 영양분들은 몸의 골 고루에 퍼져 몸을 건강하게 하는 영양소가 된다. 그러나 필요하지 않는 변이나 소변 등은 밖으로 배출된다. 변이나 소변이 밖으로 배출되기 전에는 몸 안에 다른 좋은 것들과 함께 공존한다. 사람의 몸에 좋은 것을 ‘좋은 것’(Good Things) 혹은 거룩한 것(Holy·거룩함)으로 본다면, 사람의 몸에 좋지 않은 것은 ‘나쁜 것’(Bad Things) 혹은 악한 것(Evil·악함)으로 보아 타당하다면 결국 사람의 몸은 성(聖), 속(俗)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된다.


사람의 몸 안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공존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함께 있어 항상 싸우게 된다. 이것을 갈등이라 하면 어떨까. 고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갈등으로 시작해 갈등 가운데서 살다가 갈등 가운데서 죽어간다. 갈등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나 혹은 다른 동물과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현대신학에서는 신도 갈등을 느낀다고 한다. 신이란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땅 아래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세상에서 사람과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하며 사람이 갈등을 느끼듯 신도 똑같이 갈등을 느끼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존재로 해석한다.

즉 신이란 하늘에도 계시지만 사람과 세상에도 함께하는 존재란 말이다.
그러니 사람의 아픔이 곧 신의 아픔이요 신의 아픔이 곧 사람의 아픔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신의 개념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근본신학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드나 잘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렇게 해석해 들어가면 신도 실수할 수 있고 신의 속성 중에도 강함과 약함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결론에 들어갈 수도 있게 된다. 결국은 신도 때리면 아픔을 느끼는 살아있는 존재로 파악하게 된다. 결코 만능일 수 없는 것이 신이 되기도 한다. 신이 만능이라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신은 만능이라 해도 만능신의 종은 그렇지 못한가보다. 그러기에, 신의 대역을 맡은 거
룩한 종들이 왜 실수를 하고 간음을 저지르며 세상에 풍지평판을 일으킬 수가 있겠는가.

“사람이니까 그렇지!” 되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은 속여도 귀신은 못속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은 속이되 자신은 속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속성이 곧 신의 속성의 갈등과 같은 관계라면 어떨까. 즉 이 말은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는 신의 성품과도 가깝다는 양심과 통하는 문제다. “거룩, 거룩, 거룩”한 주의 종이 간음했음을 시인했다. 본인의 아픔이야, 그의 말대로라면 간음이 불거져 밖으로 새나온 후 약 두 달 동안 지옥의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자백 혹은 시인할 때까지의 그의 아픔과 갈등이 얼마나 치열했을까는 본인만이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자백으로 “다윗을 용서하였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간음죄도 용서를 하였으니 교인들도 용서를 해 달라고 하는 데 있다. 이럴 때 신은, 곧 하나님은 어떻게 용서하셨을까.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니 너가 자백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하겠다. 얼마나 고통가운데 있었느냐. 이제는 더 이상 간음죄를 저지르지 말고 목회에만 전념하라!”고 하셨을까. 예수는 간음 중에 잡혀온 여자를 향한 군중에게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치라!”고 했다. 돌을 들어 던진 자는 없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 여인에게 한 말이 있다.

“다시는 이와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고. 그렇다면 간음을 자백한 그 종의 경우도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아니요 다윗도 아니요 거룩한 주의 종이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은 다윗을 회개시킨 나단의 역할이지 다윗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사죄하는 길은 “조용히 물러나, 조용히 사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 성속이 함께 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어찌해야 잘 다스릴 수가 있을까. 모두의 숙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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