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인의 약속은 지켜져야

2007-03-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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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소(전 언론인)

사사로운 개인간의 약속일지라도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깨버리면 당한 쪽의 기분은 몹시 불쾌하고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람과는 인간적 관계를 다시 맺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개인간의 약속도 아니고 40만 뉴욕동포의 정서적 상징성으로 자칭(自稱) 타칭(他稱) 거론되는 한인회장이 공식적으로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약속을 불과 약 4주만에 뒤집고 마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공인된 입장으로서는 결코 취해서는 안되는 불신행위인 것이다. 그 말을 접한 동포사회의 실망감은 또 얼마나 클 것인가.


혹 국민의 원성이 뿌리깊은 서울 여의도 광장의 정치판 주변에서 어깨 너머로 수업한 삼류 정치지망생의 모방적 언어유희라면 모른다. 그러나 남다른 결심을 갖고 태평양을 건너와 성실한 노력과 프런티어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민중의 한 사람이라면 그같은 무책임한 말장난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더군다나 40만 뉴욕 동포사회를 운운하며 모범적으로 봉사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한인회에 입성, 이미 부회장직과 회장직까지 맡아 4년 동안이나 일해 봤으면 만족할 일이지 더 이상 무슨 미련이 남아 ‘재출마 포기’ 약속을 공언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변심을 하고 재출마 의사를 발표하는가.

우리들이 미국에 이민 와 살면서 고국의 소식을 TV 뉴스나 일간지를 통해 접할 때마다 공분을 느끼고 개선돼야 한다고 보는 병폐 중의 하나가 정치인들의 말 바꾸기와 소신없는 이합집산과 그들 주변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권 결탁과 수뢰와 횡령 같은 비리가 아니던가. 일차적으로 그런 비리와 불법만 청산돼도 대한민국이 건전하게 발전해 나갈 것같은 생각이 얼
마나 절실하게 들던가.

물론 같은 피를 가진 우리들이 이민을 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게 바뀌는 것은 아닌 줄 안다. 그렇지만 풍토와 여건이 다른 나라에 와 살고 있으면 인식을 새롭게 갖고 과거의 고질적인 우리네 단점들을 과감히 털고 혁신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그와같은 솔선수범은 작더라도 단체 주변에서부터 부단히 일어나야 된다고 본다. 왜, 그들이야
말로 남다른 사명의식과 봉사정신을 갖고 단체를 만들고 단체장을 하면서 침묵하는 교포들에게 실천하지 못할 공약(公約)을 수시로 쏟아내어 이민정서를 혼탁하게 만든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애당초 꺼내지 말아야 하고 일단 공약을 했으면 머리가 두쪽 나더라도 지켜나가는 건전한 동포사회 풍토가 이룩돼야 할 것이다. 이민답지 못하게 언제까지 서울 정치를 흉내 내고 말을 바꾸고 할 것인가.

불출마 약속을 번복한 이경로 회장이 지난 임기 동안 과연 동포사회를 위해 무슨 일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했는지, 우리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최근 불거진 일련의 보도 내용들을 참고해 보면 공정성과 정직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선관위원장과 선관위원을 임명하면서 이 회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선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크건 작건, 어느 선거나 깨끗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 선관위가 존재하는 것인데 회장과 친분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선관위원에 임명됐다면 이 회장의 재출마 선언과 무관하게 보기가 어렵다.

그러니 이경로 회장은 사심 없는 초심으로 돌아가 선관위원장을 비롯해 선관위원 전원을 교체하고, 그리고 본인의 재출마를 포기하라. 좀 늦긴 했지만 그 길이 바로 교포사회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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