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착각의 늪

2007-03-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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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취재1부 차장)

“저를 반장에 뽑아주신다면 마치 손수레를 다루듯 담임선생님은 앞에서 끌고 저는 뒤에서 밀며 학급생 여러분들을 모두 태우고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해 보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반장선거에 나왔던 한 상대후보가 학급생들에게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며 던졌던 말이다.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새삼 그때 그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오르는 것은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 우리사회에서 갈수록 빛을 잃어가는 것이 아쉬워지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한인 이민사회에서 감투싸움을 하는 단체장들의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
(?)해진지 오래다. 젊은 단체장들은 물론이고 힘든 몸을 의지하던 지팡이로 삿대질을 해대며 상대에게 달려드는 어르신들까지 볼썽사나운 모습의 이 대열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다. 연령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 하나 본받을 만한 인물다운 인물을 찾기 힘든 것이 요즘 이곳의 한인사회 모습이다.


특히나 한인사회 소식을 전하는 신문지상에 사진과 기사가 실리고 이름이 오르내리다보니 마치 자신들이 한국의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는 단체장들도 부지기수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손바닥을 뒤 짚듯이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하며 그럴싸한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는 모습도 이러한 착각에서 비롯된 한국의 정치판 흉내 내기와도 흡사하다.

굳이 기자회견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내용으로 언론매체를 모두 불러 모으고는 정작 알맹이 없는 내용으로 폼만 잡고 시간낭비만 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나름대로 언론사에서 선별해 불필요한 행사나 모임, 기자회견 등에 불참이라도 하면 버럭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며 자신의 얕은 인격을 드러내는 단체장들도 꽤 있다.

뿐만 아니라 취재 후에는 자신이나 관련 단체의 기사와 사진은 특정 지면에 배치돼야 한다거나 기사는 어떤 방향으로 쓰라고 마치 지시라도 하듯 주제넘은 조언을 서슴지 않는 경우도 있다. 비슷한 활동을 펼치는 유사 단체 관계자들끼리는 서로를 깎아내리는데 신경이 곤두서 있고 자신들이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기 바쁘다.

소속 회원이나 공익을 위한 단체의 활동 홍보보다는 개인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이러한 일그러진 모습의 단체장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정녕 봉사하며 섬기는 자세로 단체를 이끌겠다며 공약을 내걸었던 그때 그 사람들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빈말과 거짓말을 일삼는 믿음이 없는 단체장은 한인사회의 냉정한 심판을 받고 더 이상 한인사회를 기웃거리지도 못하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마셜 쿡이 쓴 ‘10분에 마스터하는 동기 부여’라는 책에는 “권위란 직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권위는 당신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그들이 당신과 같은 방향으로 가기를 원하고, 또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을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을 따르기로 결정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한인사회 단체장들은 자신의 현재 위치와 주어진 권위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는지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소속원을 태운 손수레를 자신이 땀 흘려가며 직접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기보다는 자신이 혼자 손수레에 편히 올라탄 채 소속원들이 당연히 밀고 끌며 받들어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반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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