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외교는 전쟁이다

2007-03-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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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한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은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각료들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에 대해 일반 국민들과 뜻있는 인사들의 반대가 맹렬하여 어떤 이는 자살로서 항의를 표시했는가 하면 각지에서 의병이 분기했다. 을사보호조약 후 당시의 고종황제도 본인의 의사가 아닌 점을 밝히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가 이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했다.

이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을 사전에 조율한 국제적 합의가 미일간에 맺어진 가쓰라-테프트 밀약이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태프트 육군장관을 일본에 특사로 파견, 가쓰라 일본수상과 비밀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승인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여 러일전쟁의 강화회담으로 열린 포츠머스 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이 공식으로 확정되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또 다른 사건으로는 남북 분단을 들 수 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패전이 임박한 것을 눈치챈 소련군이 한반도로 급속히 밀고 내려오자 당시 오키나와까지 진격해 있던 미군은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을 우려해 38도선을 경계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자고 제안했다. 이리하여 미소간 군사활동의 경계선으로 생긴 38선은 이후 우리 민족에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주고 있다.

이처럼 국가간에 맺는 조약이나 합의는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안위에 큰 영향을 끼친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국민의 장래가 걸린 조약이나 합의가 다른 나라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거나 우리나라의 사람이지만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타의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고 만다.또 이러한 국가간의 조약이나 합의는 하나의 약속이지만 이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도중에 일방적으로 파기되는 경우도 많다. 국가간의 이합집산이 심했고 영웅호걸들이 천하를 다투던 고대 중국에서는 국가간 합의도 많았고 파기도 많았다. 우리가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삼국지만 보더라도 필요하면 합의를 했다가 언제라도 깨고 뒤통수를 치는 군웅들의 이합집산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대표적 사례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케이스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항우에 비하기에는 부족한 인물이었고 병력과 군세에서도 훨씬 뒤졌다. 그런데 항우와의 마지막 장무산 결전에서 승패가 나지 않자 천하를 2분하자는 제의로 항우와 화평을 맺었다. 그리하여 퇴군하는 항우군의 뒤통수를 쳐서 격파해 버리고 천하를 통일했다. 이 모든 꾀가 모사인 장량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장개석 군대가 공산군 토벌을 본격화하자 1934년 공산군이 이에 쫓겨 수 개월 동안 장장 1만2,000 킬로미터를 도주한 사건이 유명한 대장정이다. 이 대장정으로 공산군은 거의 전의를 잃었고 재기의 희망도 없었다. 대장정 도중 공산군의 주도권을 쥔 모택동도 동굴 속에 숨어서 담배만 피워댔을 뿐, 묘수를 찾을 수 없었다. 이 때 발생한 것이 1936년 만주 군벌 장학량이 장개석을 인질로 가두고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서안사건이다. 이 국공합작으로 공산군은 장개석 군대와 대일항쟁에 함께 나섬으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국공합작기간 동안 공산당 군대는 합법적으로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해방지구에 공산주의의 씨를 뿌려나갔다. 이 결과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공산당은 막강한 군대와 민중의 지지기반으로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아버리고 중국대륙을 공산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국가의 조약이나 합의는 국가와 국민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많은 변수도 내포하기 때문에 두가지 전제 아래 맺어져야 마땅하다. 첫째는 대다수 국민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둘째는 전략적 검토와 전문적 분석 위에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외교를 외교전이라고 하여 전쟁에 비유하는데 전쟁이라면 모든 국민이 성원하고 제갈공명과 같은 앞을 내다보는 지도자가 이끌어야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은 또 한번 중대한 외교전의 와중에 있다. 남북을 특사가 왔다 갔다 하고 미국과 북한 사이를 특사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북미수교와 평화회담이 곧 실현될 것이라고 한다. 이 모든 변화가 한국의 장래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그런데 한국이 지금 이같은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일반 국민은 대체로 남북 외교에서 소외된 상태이며 한국정부마저 북미관계의 내막에서 밀려나 있다. 모든 정치적 관심이 다가올 대선에 집중되어 있으며 사람마다 외교문제에 목소리가 다르고 남북관계가 대선용이라는 의구심도 나오고 있다. 외교가 전쟁이라면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남북문제는 국민적 합의에 따라 초당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누구에게도 정치적 이용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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