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축복의 씨앗

2007-03-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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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주 영 <논설위원>

하루에도 몇 차례 날씨가 바뀌는 변덕스런 도시 뉴욕은 3월에도 눈발이 날리고 찬바람이 불기도 하지만 잔디밭을 보면 여기 저기 분위기가 벌써 다르다. 지난 주만 해도 영하 10여 도로 급강하 하던 기온이 며칠도 되지 않아 화씨 60도를 기록하는 등 요란을 떨지만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플러싱은 뉴욕의 어느 지역보다도 다양한 종류의 꽃나무들이 있는 동네이다. 그래서 봄이 오면 집집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꽃들이 경염을 하는 듯 활짝 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플러싱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자기가 사는 동네를 비하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플러싱의 역사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본다.


플러싱에 본격적으로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 무렵부터라고 한다.당시 플러싱 후레쉬 메도우에 파크가 조성돼 만국 박람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는데 그 때부터 플러싱 지역에 고급 단독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플러싱 일대가 대규모 묘목원 지역으로 뉴욕전역에 꽃나무를 공급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독립전쟁 때 워싱턴장군의 부대가 이 묘목원에 주둔했다는 기록도 있다. 묘목원 자리에 주택가가 형성되면서 각종 꽃나무들이 집집마다 옮겨 심어져서 플러싱에 봄이 오면 다른 어떤 동네보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다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온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것은 자연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의 시간관은 직선적인데 반해 동양 사람들의 시간관은 순환적이다. 순리적으로 돌아가는 시간의 바퀴를 보고 동양철학에서는 역사는 순환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한 자연사상은 인과응보의 법칙이라는 종교사상을 낳았다. 인과응보의 법칙이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처럼 ‘악업을 쌓으면 벌을 받고 선업을 쌓으면 복을 받게 된다’는 원리이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업(業)이라 하고 그 결과를 업보(業報)라고 한다. 자연법칙처럼 원인에 따라서 업보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데 당대에 받지 않으면 그 후대에라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순환의 법칙은 피할 수 없이 필연적인 것이지 우연이란 없다. 현생의 시련은 전생의 업보이며, 현재의 나의 행위는 후세에 업보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고찰은 과연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어느 시대보다도 종교적 성향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계절의 순환을 막을 수 없고, 생로병사의 비밀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고, “왜 사느냐?”는 질문에 한 줄도 답할 수 없는 것이다.

언 땅이 다시 풀리고 새싹들이 잔디를 뚫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종류의 식물일까 생각해 본다. 누군가 씨를 뿌렸거나, 무슨 무슨 씨앗이 싹트는 것이려니... 그러나 모든 씨앗이 다 좋은 씨앗일 리는 없다. 똑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좋은 업적을 남기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을 소란스럽게 악하게 사는 인생들이 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새 봄을 맞아 주어진 삶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더 선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곱씹는다.

수년 전 미국의 부자들이 엄청난 재산들을 사회에 환원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연간 최고 소득자가 되었을 때 기자들이 그 부모에게 “얼마나 기쁘냐?”고 질문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나는 내 아들이 최고소득자가 되기보다도 최고의 기부금 납부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드디어 지난해 빌 게이츠는 연간 최고의 기부금 납부자가 되었다.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인 것이다. 주식투자의 대가인 워렌 버핏이 얼마 전 자신의 재산의 거의 다를 빌 게이츠의 자선 재단에 기부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태도는 좋은 씨앗을 심은 것임에 틀림없다. 자기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므로써 결국 이 땅의 미래와 내세에 활짝 꽃피울 축복의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겠는가. 뉴욕의 한인 동포사회에도 꿈과 미래를 위해서 좋은 씨앗을 심는 한인들이 여기 저기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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