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름살

2007-03-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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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돈이 될만한 재산을 부모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하였으니 평생 부지런히 일을 하며 나는 살았다. 그러면서도 이것저것 생각하기를 좋아하느라 정작 행동은 느렸으니 그나마 천복이라 여기면서 여유는 달고 살았다. 그런데 꽃잎 떨어지는 소리, 잎새에 햇빛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조용한 산길 옆, 차라리 적막이 귓전을 때리는 한적한 시골 작은 집에서 세월이 주물러 놓은 조각품을 유심히 바라보며 살던 내게 드디어 바쁘게 생각하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그것은 아내였다. 새봄에 돋는 나무 가지의 싹은 눈웃음이 철철 넘치지만 고목에 돋는 싹은 색깔만 비슷하지 온몸으로 내뿜는 무거운 한숨이 지천으로 퍼져 나간다. 아내의 보이지 않는 한숨은 나이 때문이었고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얼굴에다 골을 파며 길을 내는 주름살 때문이었다.깊게 패인 굵은 주름은 무엇이며 잔주름은 무엇일까? 아프다는 말조차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가 원인 모르게 몹시 앓았을 때, 아니면 자전거 한 대 들고 집을 나간 막내아들이 일년 가까이 아무런 소식 없이 세상을 향해 내딛던 페달이 아내의 얼굴에다 깊게 패인 굵은 주름으로 길을 내었을까?


인생에도 봄이 있으니 봄 때에는 사랑을 알게 하고, 또한 인생에도 가을이 있으니 가을 때에는 많은 것을 뒤돌아보며 생각을 하게 한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란 우여곡절이 이어준 동아줄이다. 나는 무엇이었을까? 명산이나 청산에는 물이 있다. 산이 작아도 물이 있거나 물이 흐르면 명산이나 청산이 되고 산세가 우람해도 물이 흐르지 않으면 악 산이나 험 산이 된다. 산에 가면 바람소리 보다는 물소리가 귀에 가깝고, 산행을 해도 샘물이나 개울물이 없는 등산길은 메마르고 힘들다. 노인역(老人驛)에 다다른 아내에게 그동안의 나는 무엇이었을까? 조갈진 아내의 입에 한 종지 정도의 물이라고 건네주는 사람이었을까? 거울 앞에서 주름살도 펴보고, 흰 머리카락에 염색약을 바르며 중얼중얼 내뱉는 가벼운 몇 마디의 말에도 나는 그동안 아내를 위하여 무슨 위로의 말을 준비했는지 그저 빈 손 들고 속수무책일 뿐이다.

한국인의 오랜 습관인 남존여비를 부정하고 부부가 평등해지면 평안을 얻고 평안을 얻으면 집안이 평화스러워진다고 여겼던 나는 남존 여존을 부르짖으며, 아내를 항상 나와 똑같은 선 위에서 생각하게 하고 남녀 차별 없이 행동하며 집안 일도 네가 할 일, 내가 할 일 가릴 것 없이 같이 꾸려왔다.안개가 끼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길은 항상 거기에 있었는데 화를 내면 길이 보이지 않았고, 흥분하면 보이던 길도 보이지 않았다. 잃어버렸던 길, 숱하게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그 길이 아내의 얼굴에서 하나 둘 큰 길을 내면서 나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한다던가, 죄 아닌 죄의식을 가져보라 하면서 크게 나타난다.

이해와 보살핌은 물과 같다. 산밑의 물살에 깎기면서도 산은 강을 이해하기에 흐르는 강 옆에 서 있고, 강은 산을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적시어주겠다는 보살핌으로 산밑을 흐른다. 하늘은 땅을 이해하기에 땅을 내려다보고 있고 땅은 하늘이 보살펴 준다는 것을 믿기에 배를 다 까 내놓고 누워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믿으니 단비로 마른 흙을 적시어주는 단비, 장마가 지나면 바라지도 않았는데 젖은 흙을 말려주는 바람들, 나는 무엇이었을까? 빈 하늘, 찬 하늘에도 뜨거운 해 하나는 있고 칠흙같이 캄캄한 밤에도 맑은 별은 있거늘 나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내의 얼굴에서 그간에 있었던 인내도 읽고, 첩첩이 쌓인 역경도 읽고, 원망과 메마름도 읽는다. 갈증을 먹이로 살고 인생의 길을 말없이 가는 선인장같은 아내의 목마름, 남자는 인성(人性)으로 세상을 취해서 살지만 여자는 신성(神性)으로 살과 마음을 깎으며 산다. 그러니 단비도 아니었고, 해도 아니었고, 별도 아니었다. 그저 아내의 작은 손에 매달려 끌려가는 힘든 달구지 위의 무거운 짐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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