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봄이 오는 길목에서

2007-02-2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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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계절을 느낄 사이도 없이 또 한 해를 보내고 봄이 오는 길목에 다시 서 있다. 언 땅을 뚫고 솟아올라 힘찬 생명의 태동을 예고하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번 겨울은 좀 이상하리 만치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봄인 양 하더니 뒤늦게야 제 모습을 드러내고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츠리게 한다.허나 제아무리 동장군이 위용을 드러내고 맹위를 떨친다 하여도 자연의 섭리는 어길 수가 없는 법. 지구는 변함없이 돌고 돌아 입춘이나 우수가 지난 지 벌써 오래이고 개구리가 겨울잠을 깨고 나온다는 경칩이 곧 다가온다. 나목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도 머지않아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면서 우아한 자태를 보란 듯이 드러낼 것이다.

어릴 때 한국에서 고향의 봄은 나즈막한 뒷동산 산자락 어느 곳에나 붉게 물드는 진달래 동산에서 찾아왔다. 성장 후에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제주도 유채꽃 밭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이 곳 뉴욕에도 노란 색의 개나리꽃이나 허드슨 강변의 푸른 물결에서 봄이 옴을 느낄 것이다. 길거리도 따사로운 봄볕을 맞아 활보하는 여인들의 발걸음으로 더욱 분주해질 것이다. 아직은 겨울의 음침함과 묵직함 때문에 오금을 펴지 못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따사로운 봄볕 아래 어깨를 활짝 필 것이다.


“봄볕에 며느리 내 보내고 가을볕에 딸 내 보낸다”는 속담이 있는 걸 보면 봄볕이 가을볕 보다는 좀 더 고약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그 따사로움과 나른함 속의 행복, 그걸 새삼 가져보고 싶은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긴장과 혼돈의 삶, 이제는 떨쳐내어야 하는 삶의 무게를 가늠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동토의 땅이 서서히 해동하고 온 만물이 소생하며 새싹이 움트는 새로운 삶이 요동치는 계절, 그래서 봄볕의 따사로움 속에 뒤를 돌아보고 영혼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한다.

어느새/ 기척도 없이 다가와/ 검은 산허리 아지랑이로 감아놓고/ 가녀린 눈짓으로 피워낸/ 달래냉이 꽃다지/ 겨우내 다스렸던 사랑으로/ 눈 가득히 굽어보며/손짓하는 그리움으로/ 잠시 서성이다 가는 나른한 봄날은/ 어느 날 저문 하늘에 돌아서고 뒤돌아보며/ 노을로 물들어 안식도 없이/ 아득한 외로움의 숲으로/ 숨가쁘게 찾아가고 말아. 어느 사이 아지랑이 같은 봄기운이 스며드는데 지인 한 분이 자기의 ‘봄 시’라며 이메일로 보내주면서 재촉을 한다. 올해는 좀 여유를 가지라고... 내게도 봄은 정녕 찾아오나 보다.

주말에 시간을 내 딸과 함께 예쁜 옷이나 머리핀을 파는 상점을 들여다 보거나, 따끈한 커피나 티 한잔을 손에 들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그 옛날 종로 다방의 차(茶)맛을 추억하는 것, 센트럴 파크의 야외음악당에서 봄맞이 연주를 들으며 한동안 잊었던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을 음미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새 봄의 여유가 아닐까.
사계절 중 겨울이 유달리 부담스러운 것은 우선 사람의 마음부터 움츠려 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이 혹독한 기승을 부릴수록 더 애절히 기다려지는 것이 봄인데 봄이라고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봄이 될 수 없는 게 서글픈 우리의 현실이다. 봄이 목전에 와 있는데도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봄이 오는 걸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삶이 어렵고 힘든 사람이나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 언제 자유의 몸이 될지 모르는 생지옥 같은 생활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과연 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인간은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이들에게는, 어느 계절이든 항상 몸서리쳐지는 추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겨울이 지나면 다시 새 봄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봄이라고 다 같은 봄일 수 있으랴.아무리 춥고 살을 에이는 겨울일지라도 만일 당신을 데리러 올 연인이 따스한 봄을 기다리고 있다면 경쾌한 봄의 소리가 귓전에 울리지 않겠는가. 올 봄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보듬어 주면서 희망찬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희망한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새 봄의 향연에 모두 동참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그런 봄이 되도록 하자. 경쾌한 요한 스트라우스의 ‘봄의 소리’를 다 함께 감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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