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유구무언, 그리고 ‘편자’

2007-02-26 (월)
크게 작게
호기선(하버그룹 수석 부사장)

40대 중반의 아이리쉬계의 여성 팀장이 우리와 같이 일하고 있는지도 벌서 20년은 훨씬 넘은 듯 싶다. 상냥하고 인사성 밝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전문적인 직업여성이다. 항상 싫은 것은 싫고, 좋은 것은 좋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기로 알려진, 틀림없는 사람이다.

작년 여름에 바바라는 3주간의 긴 휴가를 어디론가 다녀왔다. 돌아온 얼굴이 별로 타지 않은 것이 이상해 보였다.며칠 후에, 잘 드나들지 않던 내 방에 들어오면서 너의 나라는 여기서 듣던 것보다 참 좋더라고 하면서 씨~익 웃는데 나는 놀랐다. 난데없이 한국은 왜?
그 안에 아무에게도 말을 안 했지만 오랫동안 수속해 오고 기다리다가 기어코 한국에 가서 예쁜 딸을 양녀로 데려왔다면서 무척 자랑스러워 한다. 사진을 보여준다. 예쁘게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내 얼굴이 굳으면서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전세계에서 고아 수출국으로 으뜸갔던 나라가 한국이었다. 6.25전쟁(소위, 남한을 휘어잡고 있는 386세대들은 동란이 아니고 전쟁이라고 주장)이 있었으니, 그 때에는 그런대로 정당한 듯한 핑계라도 있었지만 50여년이 지난 오늘, 기어코 첫번째 수출국은 간신히 면했지만 이제는 무슨
핑계를 늘어놔야 하겠는지? 회사 사람들은 바바라가 한국에서 예쁜 딸을 데려왔다고 경사라도 난듯 수다들을 떨면서 축하해 준다. 그럴수록 나는 자꾸 쥐구멍을 찾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 미국 일간지에 한국여성들의 매춘 현장이 일망타진된 사건이 탑 기사로 뉴욕을 시끄럽게 하면서 우리 한인들을 괴롭혔다. 북한이 미사일을 쏴대면서 전세계를 뒤흔든 일이 생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다음날, 회사 안에서 여러 사람들과 마주치면서 이런 일 저런 일들을 말하면서도 아무도 내 앞에서 한국여성들의 매춘이나 김정일의 미사일이나 아니면 바바라의 한국아이 양녀에 대한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유구무언이다. 이것이 미국사람들의 좋은 습관임에는 틀림 없으나 나는 편치가 않다.

그들의 침묵이 정말로 더 무섭다. 뒤에 가면 자기들끼리 별 이야기 다 할 것임에는 틀림없을텐데 생각하니 뒤통수가 무거워진다. 한국사람인 나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화제를 피하는 것임에는 틀림 없다. 나도 먼저 꺼내고 싶지도 않은 대화이기에 나마저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우리와는 달라서 미국사람들의 유구무언은 오히려 대놓고 말하는 것보다 몇배 더 무섭게 느껴진다. 유명 브랜드를 마치 내 것인양 뻔뻔스럽게 무작정 찍어내면서 소위 짝퉁 생산국으로 이름나 있는 한국, 이태리의 밀란에 궂이 가지 않아도 새로 나오는 브랜드의 패션을 서울에 앉아서 DDM(동대문시장)에서 살 수 있다는, 창조성보다는 변칙기동성(?)이 뛰어난 한국. 미국 곳곳 마사지팔러가 털릴 때마다 빠지지 않고 튀어나오는 한국여자들의 이름들.

제 2의 ‘짐-존스’가 나오면 어쩌나 염려될 만큼 변형돼 가는 ‘컬트’와도 같이 유사해 가는 일부의 한국 교회상들. 이혼율이 50%에 육박한다 하면서 자기들의 쾌락의 산물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치는 무정하고 무책임한 한국의 젊은이들. 외교관례를 완전히 무시하고 정상회담에서 사전에 의논되지도 않은 즉흥적인 아이디어를 도마위에 올려놓는 한국의 대통령...

‘편자’(horse-shoe)는 말(horse)의 발바닥에 없어서는 안된다. ‘편자’가 있어야 말은 잘 걷고 잘 뛴다. 이 ‘편자’가 아무리 좋다고 해서 이것을 개(dog)의 발에 붙여서는 안된다. 하등 가치도 없고 그 역할도 못하고 쓸모도 없다. 우리 한국은 바야흐로 세계에서 열 한번째의 경제 강국이라고 자부한다. 강국이란 돈만 많다고 강국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개의 발에 ‘편자’를 붙이는 꼴불견을 보여서는 안되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