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간적인 가르침이 우선돼야

2007-02-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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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환(뉴저지)

옛날 미네소타에서 활로 잉어를 잡는 것을 보았다. 연못에 잉어가 많아 화살에 약 30미터 정도의 줄을 매어 활을 쏴서 잉어가 화살에 꽂히면 그 줄을 앞으로 잡아당겨 잉어를 끌어냈다.옛날 공자 당시에는 그런 활(주살)을 이용하여 새를 잡았던 것 같다. 공자는 낚시는 즐겼지만 주낙으로 물고기를 잡지는 않았고 또 그는 주살로 새를 잡았지만 둥지에 들어있는 새는 쏘지 않았다고 한다.

둥지에 들어있는 새는 알이나 새끼를 품었을 수 있고, 또 아프거나 피곤한 몸을 느긋하게 쉬는 수도 있다. 공자가 그런 새를 쏘지 않았다는 것은 새한테 일지라도 야비하거나 비겁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야비하거나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몹시 원망하거나 큰 원한을 품지는 않는다.공자의 가르침은 이렇게 상대방이 아니라 우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다. 자비나 사랑을 베풀기 앞서 인간으로서 자기 수신(修身)을 먼저 하라는 가르침이다. 공자는 우리가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것을 가르쳤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등한 사랑(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을 역설했다. 그의 사랑은 온 인류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이지만 인간이 아닌 동식물이나 무생물에 대한 사랑은 아닌 것 같다. 예수는 온 인류의 죄를 혼자 모두 뒤집어 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것만 봐도 그렇다. 기독교적 자연관은 하나님이 자연을 인간에 부여했다고 봐서 자연을 인간이 통제하고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자연에 대한 사랑은 평등한 사랑(博愛)이 아니라 굽어 보는(인간과 차별이 있는) 사랑이다.

석가의 자비는 그 대상이 온 인류 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삼라만상까지 포함된다. 하루살이나 모기 같은 조그만 생물까지 사랑할 뿐 아니라(慈) 그들의 슬픔까지 함께 슬퍼해 주는(悲) 것이 바로 석가의 이상이다. 그렇게 보면 석가의 자비는 예수의 사랑보다 넓고 깊으며 공자의 사랑(仁)보다 훨씬 더 심오한 끝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이나 석가의 자비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 보통 사람들이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공자의 사랑은 예수의 사랑이나 석가의 자비를 행하기 앞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본성(天命/明德)을 찾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일상 생활에서 올바르게 실천해야 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이와같이 공자는 예수나 석가처럼 온 인류나 억조 창생을 위하여 고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혜를 몸소 가르치려 하였다.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이 사후 세계에서라면 공자의 가르침은 이 현실세계에서이다. 그렇게 공자의 가르침은 예수나 석가의 가르침 보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을 향해 있다.
불교에서 공자를 보완적 관계로 보는데 대하여 기독교에서 공자를 예수와 대등한 관계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공자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자기 스스로의 수신에 힘쓴 겸손한 분이며, 그 분이 살아생전 예수나 석가를 알았더라면 그 분들을 모두 공경하였을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공자를 예수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흔드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모르겠으나 어딘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예수나 석가 같은 고차원 사랑도 필요하지만 우선 맨 먼저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가르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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