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헤매지 않는 한 해

2007-02-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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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면 피곤하게 느껴진다. 삼 백 예순 다섯 날을 쉬지 않고 왔으나 손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사람은 쉬엄쉬엄 걸어서 왔고, 어떤 사람은 뭐가 그리 급했던지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려왔다. 그러나 양쪽 모두 거두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아무런 수확 없이 일년을 다 보낸 사람을 두고 방황한 사람이라고 한다. 방황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깨달아야 할 잘못이 있고,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 그 잘못을 돌이켜 보면 부끄럽게 느껴지게도 된다.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나중에 올 부끄러움을 미리 생각할 줄 안다면 우리는 방황하지 않게 된다.
나와 당신, 하늘과 땅,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와 곡식이 익고, 단풍이 들다 지고, 흰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겨울이 우리에게는 의미있는 결과이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돌고 돌면서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다.


무엇을 또 찾으려고 방황하겠는가? 을씨년스러운 산간이나 뼈만 남은 동네 길의 앙상한 나무들이 바로 얼마 전에 낙엽이란 이름으로 숱한 내용의 이야기를 보란듯이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로 흰 눈이 잠시만 내려도 세상은 포근하고 하얗게 완전히 바뀐다. 그런 걸 보면서도 우리는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무슨 마음에 어떤 표정을 짓고 세상살이 하루하루를 살던 간에 말 한마디면 그 마음도 그 표정도 단숨에 바뀐다.

좋은 말, 사랑이 묻어나는 말 한마디면 그늘이 잔뜩 낀 얼굴의 표정도 곧 환하고 보기에 편안한 얼굴로 만들어 낸다. 좋은 말, 편한 말, 따스한 말, 용기를 주는 말들은 이미 우리에게 있는 말인데 남에게 건네줄 무슨 말을 찾아 또 헤매려 하는가? 꺼내기만 하면 되는 그 쉬운 말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느라고 얼마나 힘들어 하였는가?

말은 가정이나 친구간이나 직장이나 심지어는 거친 사회를 평화스럽게 만드는 주춧돌이요, 기둥이며, 울타리이다. 우리는 우선 말에서 헤매지 말아야 하겠다.육신의 눈으로 보는 시야는 언덕을 넘지 못한다. 앞에 있는 것은 보여도 뒤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겉은 보여도 속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스쳐가는 분노와 노여움은 보여도 가슴 속에 고여있는 사랑과 인내는 보이지 않는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이란 마음의 눈으로 찾아야 하고, 마음의 머리로 헤아려야 한다. 내 마음을 통치하고 가다듬을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바로 내가 아니겠는가.이 세상에 ‘나’라고 하는 열매보다 더한 가치를 지닌 것은 없다. 값진 다이아몬드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다친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버릴 것이다. 그것은 ‘나’라고 하는 가치는 그 어느 것보다도 상급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육신과 생명을 주었을 때 은이나 구리 정도의 가치로 정하였겠는가?

장애의 몸으로 세상에 온 자식이나, 한때 잘못을 저지른 자식이라도 그의 부모는 그 자식의 가치를 측량하지 못할 만큼 높여놓고 사랑한다. 부모의 사랑을 느낄 때 자식은 피보호자로서 감사를 느끼면서 가족이 된다.
종교의 지상과제가 무엇인가? 그것도 평화이다. 분노와 원망이 아니라 사랑과 양보와 배려가 있을 때 평화는 이루어진다. 이 세 가지의 덕목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한 큰길이던 작은 길이던, 산길이던, 들길이던 줄줄 흘리며 다니고 싶은 사랑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삼백 예순 다섯 날을 헤매며 살아왔다. 그 까닭은 아직도 우리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였고 사랑받을 짓을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사랑을 받으려면 우선 내 손이 깨끗해야 한다. 더러운 손으로는 남의 손을 잡을 수가 없다. 더러운 발로는 온돌방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아무리 금이 많이 섞인 돌이라도 정금을 하지 않으면 금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주고 싶은 사랑이 많아도 깨끗하지 않으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배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을 듬뿍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점이 어딘지 모르고 하루종일 왔다 갔다 하는 전차가 되고 만다. 깨끗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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