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송구영신(送舊迎新)

2006-12-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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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미국은 거대하다. 파도치는 대양에 떠있는 항공모함처럼 거대하다. 그러나 항공모함의 활주로는 짧다. 활주로가 짧기 때문에 항공모함에 탑재되어 있는 비행기는 언제나 전 가동의 힘으로 질주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온 힘을 다해서 달려야 하는 항공모함의 짧은 활주로, 그것은 이민의
특징이기도 해서 직선의 그 짧은 활주로를 온 힘을 다해서 달린다면 그 짧은 활주로의 끝은 추락지점이 아니라 새로운 도약의 출발점이 되고, 도약 후에는 가속과 창공을 자유자재로 나르는 힘이 생겨난다.

우리는 항공모함의 짧은 활주로에서 질주하는 비행기다. 일년이란 시간도 우리에게는 짧다. 그 짧은 활주로에서 전력을 다하는 우리 이민생활 위에 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온다. 가는 것도 아랑곳 없는 세월이요, 오는 것도 아랑곳 없는 세월이다. 그런 세월이지만 우리는 지금 숨이 차다.
시간이란 쓰는 자에게는 내 것도 되어주고 네 것도 되어주는 아량이 있지만 쓸 줄 모르는 자에게는 있는 줄도 모르고 가는 줄도 모르는 헛 껍데기일 뿐이다. 그러니 시간은 쓰는 자에게만 형상으로 나타나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가치의 상급이 매겨진다.


일년이란 세월은 너에게만 왔다가 가는 것도 아니고, 또한 나에게만 왔다가 가는 것도 아니다. 이 땅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모든 것 앞에 왔다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가는 세월, 올해도 다름없다.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또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지나간 한 해에 뜻하지 않았던 아픔이 있었으면 새해에는 기쁨도 있을 터이고, 지나간 한 해에 불행이 있었으면 새해에는 행복도 있을 터이다. 잃은 것이 좀 잃었다고 해서 이미 차려놓은 이민밥상에 둘러앉아 가족의 얼굴표정이 무겁고 평화스럽지 않으면 무슨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믿어야 한다. 새해를 믿고, 아내가 남편을 믿고 남편이 아내를 믿고, 부모가 자식을 믿고 자식이 부모를 믿어야 한다. 사람은 사회를 믿고, 사회는 사람을 믿고, 친구는 친구를 믿고 이웃은 이웃을 믿어야 한다. 또한 하늘이 먼 것 같으면서도 항상 우리 곁에 있으니 하늘의 운영을 믿어야 한다. 믿으면 신이 난다. 믿지 않으면 돋아나지 않는 흥, 절기마다 절기를 믿고 흥분을 덧보태어 들뜨는 이유는 오는 것에 흥을 돋구기 위해서이다. 신이 나야 일이 풀린다고 하지 않는가?

세모의 밤은 천길 만길 깊다. 다 털어버리고 아니, 지난 것들 다 잊어버리고 동녘에 새해의 새로운 해가 뜨면 새롭게 시작하라는 세모의 밤은 누구에게나 깊다.작은 눈으로 큰 세상을 보려니 눈에서 눈물이 나도록 아리기도 했겠지만, 눈물로서 눈동자를 닦았으니 그 눈이 얼마나 단련이 되고 시원하고 맑겠는가!지나간 한 해의 일들이 어려웠다고 말하지 말자. 지나간 일들이 고통스러웠다고 생각하지 말자. 흔들리지 않는 나무 가지가 비바람에 꺾이지 않는 힘을 키울 수 있었을까?

비를 맞으며,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어두운 밤에 바라보는 별, 나무는 그렇게 희망을 믿으며 커서 한 해의 열매를 맺었으며 또 맺으려니...
자, 옛 것은 가고 새 것이 온다. 옛 것은 멀수록 더욱 그립고 새 것은 금방 좋은 법이다. 쓰기에 아까운 새 것 앞에 흥분으로 들떠서 밝은 얼굴로 서자. 온 마음을 다해서 들떠야 항공모함의 짧은 활주로 같은 짧은 한 해의 운수가 우리를 뜨겁게 뜨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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