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대통령의 막말

2006-12-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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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예로부터 사람의 됨됨이를 살피는 기준으로 신언서판이란 말이있다. 그 사람의 생김새, 말, 글, 판단력을 말한다.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 지식 등 내면적 값어치는 그 사람의 몸에서 풍겨나고 말과 글에서 나타나고 사리판단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언
행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언행으로 보아 어리고 유치한 사람은 유치한 말과 행동을 한다.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대학생과는 다르다. 젊은 아가씨들은 밝고 생기발랄한 말과 행동을 하고 노인들은 어눌하고 굼뜬 말과 행동을 한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들의 말
은 부드럽고 공손하지만 깡패나 양아치 등 시정잡배의 말은 저속하고 거칠기 그지없다.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논리적이고 교양있는 말을 쓴다.

대통령이 최고 수준의 지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 말이 어느 정도 지도층에 부합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을 볼 때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는 연로한 분위기가 있지만 교양있는 말을 썼다. 박정희는 좀 카랑카랑하고 차가웠
지만 모범생같은 말을 또박 또박 했다. 전두환은 박정희와 비슷한 스타일이었고 노태우는 매우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점잖은 말을 썼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가끔 튀는 말을 했지만 정치인의 수준에 걸맞는 말을 했다.
이에 비해 노무현은 사뭇 달랐다.


처음부터 막말을 서슴치 않았다. 이런 그의 말투가 많은 사람에게 친근감을 주어 대통령이 되는데 일조를 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 “깽판”이니 “대통령 못 해먹겠다” “막가자는 것이냐”는 등 입만 열었다 하면 오뉴월의 소나기처럼 거침없이 막말을 쏟아내는 그를 보는 사람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사람을 대통령이라고 뽑았구나 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배울 것을 걱정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막말의 극치가 지난 21일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통자문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타났다.

자신의 비판 세력에 대한 적의와 반감이 가득찬 격앙된 연설에서 그가 쏟아낸 막말들을 보자. “20년 넘게 북한의 국방비 10배를 넘게 썼다 … 그 많은 돈을 우리 군인들이 다 떡 사먹었느냐” “대한민국 군대들이 지금까지 뭐 했는가. 심심하면 세금내라 하고 불러다 뺑뺑이 돌리고 훈련시키고 했는데 그 위의 사람들은 뭐했어. 자기들 나라 군대 작전통제도 하나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방장관이요, 참모총장이요’ 그렇게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것이냐” 등등. 주먹을 불끈 쥐고 연단을 내려 치면서 언성을 높힌 1시간10분의 연설은 맨정신으로는 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헌법상 국군통수권자인 국가 원수가 군복무를 “군대 가서 썩는다”고 했으니 그 군대가 어떻게 될까. 바른 말 쓴소리로 유명한 조순형 의원은 “건국 이래 어떤 대통령도 이렇게 품위 없고 저속한 연설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정신적 불안이 심하고 편집증도 보인다”고 했다. 얼마 전 YS가 그를 가리켜 “제정신이 아니다”고 했는데 대해서 그는 “나는 제정신이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마치 술취한 사람이 “나는 안 취했다”고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는 이 연설을 한 다음날 국무회의에서 “요즘 대통령이 동네북이 돼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다. 지금 노무현은 동네북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그의 측근들과 일부 공직자, 노사모들을 제외하고는 진정으로 그를 마음속에서 대통령으로 대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오죽하면 무슨 일이나 잘못되면 “노무현 때문이야”라는 유행어까지 생겼을까.

그가 동네북이 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답게 말하고 대통령답게 행동했더라면 명색이 국민이 선출한 헌법상의 엄연한 대통령인데 누가 그를 대통령으로 대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언행을 보는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법적으로 대통령이라고 하
더라도 마음 속에서 그렇게 대접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상 최고 통치권자였던 네로 황제나 연산군도 백성의 마음에서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막말을 해 온 그가 “이제부터 할 말은 다 할 생각이다”고 작심한듯 말했다. 앞으로 얼마나 심한 막말을 쏟아낼지 걱정이 앞서는 것은 더 이상 그의 품위를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를 법적으로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하는 한국의 국민들이 너무도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만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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