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나무의 마디

2006-12-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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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병렬(교육가)

‘대나무에 왜 마디가 있을까?’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야 다른 나무와 구별할 수 있지요’로 시작하여서 흥미로운 대답이 터져 나왔다.

‘마디가 없으면 빗방울이 빠르게 미끄러져 내리다 엉덩방아를 찧어요’ ‘마디가 없으면 심심하지요’ ‘마디가 있어야 보기 좋아요’ ‘마디가 있어야 잘 꺾어지지 않아요’ ‘마디의 수효가 대나무 나이를 나타내나?’ 한 학생이 이렇게 묻자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서 모두 생각에 잠겼다.

‘그럼, 사람이 만든 마디는 무엇이지요?’ ‘사람에게 무슨 마디가 있어요?’ ‘사람이 만든 마디는 일년, 한달, 하루…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생각해 보면 마디를 만든 대나무만 영리한 것이 아니고, 하염없이 흐르는 긴 세월을 굵기도 하고 짧기도 하게 마디를 만든 인
간의 지혜 또한 놀랄만 하다. 이런 구분이나 마디가 없다면 얼마나 지루한 세상일까. 그래서 가끔은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구분한 선조들에게 보답하는 뜻에서 이 세모를 뜻깊게 지키고자 노력한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바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나무가 마디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각자가 하나의 마디를 분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왜 마디를 똑똑하게 만들어야 하나요?’ 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나무 자신의 힘으로 마디를 만드는 것처럼, 사람도 스스로 마디를 만들도록 노력한다. 대나무의 마디가 도드라진 것 같이 우리의 마디도 확실해야 한다. 소위 ‘마디’는 한 단계의 끝마무리이며 다음 새 일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니까 마무리하는 상태에 따라 새로운 일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다.

한 단계의 끝마무리를 하려면, 어떤 종류가 있을까. 우선 자신의 마음, 대인 관계, 잡다한 사무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내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요즈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체로 한 번 쳐보는 일도 뜻이 있을 듯하다.

대인관계는 계속하여 서로 주고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반듯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마음에 부담이 되는 일부터 정리하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미안한 일, 사과해야 할 일, 감사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중의 한 가지라도 실천에 옮겨서 마음의 부담을 줄이고 싶다. 애정, 우정, 동정은 많이 생각할수록 자상하게 마음이 흐르는 것 같다.

직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도 가정사무가 많은 것이 요즈음의 생활이다. 수북하게 쌓이는 게 지불 청구서이고, 안건에 대한 의견을 알려야 하는 잡다한 질문지이다.

반세기 전쯤에도 세말에 빚을 청산하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었다. 그래서 ‘새 해가 되기 전에 밀린 돈의 반액이라도 드리겠다’ 또는 ‘금년이 가기 전에 빚을 갚겠다’ ‘해가 어두워지는데 주실 것을 청산하면 좋겠다’는 말이 오고 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말들이 없더라도 지불 마감일이 명백하여서 이를 따르게 된다.


이런 일들이 다 끝나면 생활 주변의 정리 정돈이 남아있다. 버리거나 없앨 것을 구별하고, 깨끗이 빨고 청소하노라면 어느새 새 해 맞이를 반쯤 했다. 이것들이 내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이 일을 부실하게 하면 새 해의 출발이 부실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난 해를 돌아보는 일이 즐거움에 속한다. 하여튼 이 시점까지 왔다는 것으로 삶을 구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가 많아지는 것이 삶에 대한 노력의 결과이니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그럼, 지금까지 올해의 마무리를 잘 하셨어요?’ 학생의 질문이다. ‘아직 다 못 했어. 진행 중이야. 어쩌면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새 해를 맞이하게 될 지도 몰라요’ ‘하하하…’ 학생들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며칠 남아있으니까 희망은 있다. 학생 따라 웃어본다.

무엇보다도 새 해가 밝기 전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한 해의 마무리 작업이고, 내 자신이 만드는 마디가 된다면 얼마나 즐거운가. ‘마무리’도 즐겁게 ‘새 해 맞이’도 즐겁게 하면서 삶을 노래 부르는 나날이 계속된다. 대나무한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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