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른 새벽 배달되는 한글신문

2006-12-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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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자(의사)

“나는 뉴욕타임스 이외에는 어느 신문도 보지 않는다”
“특히 미주에서 발행되는 동포신문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연말의 모임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영어권 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영자신문을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강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데 또 왜 한글로 활자화 된 신문을 절대로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자신문만을 읽는 것을 특권의식으로 마치 비싼 스포츠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듯한 값싼 허영심이다.

거짓으로 포장된 주체성(pseudo identification)을 지닌 사람들이다. 마치 명품을 모방한 모조품 같다고나 할까.


오랜 이민생활에서 아직도 정체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것 같다. 언어의 장벽과 충돌의 현장인 지뢰밭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미주한인들에게는 영어는 실탄과 같은 삶의 생존수단이다.

다민족이 살아가고 있는 미주사회는 인종, 종교의 갈등과 대립보다는 언어공동체로 단위로 나누어지고 대립해 살고 있다.

영어는 세계화 시대에 세계어로 군림하고 있고 영어권에 삶의 뿌리는 우리에게 영어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태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하여 평생동안 읽고 쓰고 말하는 모국어는 내게서 분리시킬 수 없는 숙명적인 언어이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모국어를 떼어 놓는다면 정체성도 함께 부서진다.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구사해야 하는 이중문화 속에 살면서 치러야 하는 값비싼 댓가이다.

현대인들은 미디어에서 나오는 정보를 산소나 물, 음식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살고 있다.

IT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영상과 전자매체에서 홍수처럼 쏟아내는 미디어의 바다에 익사하기 직전이다.


기름덩어리인 음식을 마구 먹어 비만증에 걸리듯 정신적으로 황폐해 가며 병들어 간다. 건전하고 유익한 뉴스만 체로 걸러내는 여과작용이 신문의 역할이다. 활자매체가 영구히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와 바램이기도 하다.

한인동포사회 공동체 네트워크의 구심점이 되고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아가는 문화권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우리 문화와 언어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싸늘한 냉기가 도는 컴퓨터의 스크린에 떠오르고 지워지는 글자와는 달리 활자화 된 신문은 정서적으로 훨씬 안정감이 있고 차분해진다.

신문은 종이이므로 숲과 나무 향기가 베어 있다. 그래서 신문을 펴고 있으면 땀과 체온이 신문으로 전달된다.

신문은 공원 벤치나 바닷가의 모래밭에 누워서 식탁에 앉아서 잠들기 전 침대의 등불 밑에서 편한 자세로 읽을 수 있다. 나무 그늘에서 신문을 덮고 달콤한 잠에 빠질 수도 있다.

미주동포 신문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일, 본국과 미국, 지구촌 구석의 기사를 가득히 실은 신문을 매일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에 집집마다 배달된다.

이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른 새벽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친구가 어디 있을까?

미주 동포들이 모국어로 활자화된 신문을 읽는 것은 모국어를 이 땅에 이식시키고 성숙히 키워나가고 지켜야 하는 사명감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른 새벽, 찬 이슬에 젖어있는 신문을 펼치는 일로 고달픈 이민자들의 매일의 일과는 시작된다.

모국어로 활자화된 신문은 이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모유와 같이 영양을 공급하는 젖줄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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