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래를 꿈꾸는 집

2006-12-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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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여행은 일상생활에서의 탈출이다. 바다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토란스(Torrance)에 있는 집을 빌려 10일간 묵고 돌아왔다.
공항에서 30분 차로 달려 예약된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진 저녁이었다. 11월 말이 되어오는 초겨울인데 집 앞에는 붉은 넝쿨장미가 피어있고 창문은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편함에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부엌과 거실이 트여져 있고 넓은 창문으로 잔디가 깔린 마당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이틀 후 추수감사절이 다가왔고 온가족이 이 집에 모두 모였다. 오븐에서 갈색빛으로 익어가는 터키, 달콤한 단호박 스웁 냄새, 옥수수와 감자 굽는 냄새와 함께 그릇 부딪치는 소리, 식구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는 온가족이 연주하는 초겨울의 협주곡이었다.나는 나그네가 아닌 집주인이 되고 싶은 충동으로 전화로 집주인에게 혹시 이 집을 팔 생각이
없느냐고 들뜬 기분으로 물었다. 주인남자는 바리톤의 굵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이 집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920년대부터 할아버지대부터 살아온 집이지요. 지금 나의 부모님은 하와이에 살고 계시고 일년에 몇번씩 이집을 다녀갑니다. 그 때는 온가족이 이 집에 모입니다”그의 말을 듣고 다시 집을 둘러보니 100년이 되어오는 이 집은 오랜 세월의 두께만큼 견고하고 튼튼한 집이다. 이 집은 가족의 전통을 지키는 값진 유산이니 재산처럼 상품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방구석에 놓인 대대로 쓰던 빛이 발한 책상들도 세월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마당 잔디밭에는 어린아이 세 발 자전가가 놓여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고 미래를 꿈꾸는 집이다. 낡은 것과 녹이 쓴 시간들, 마이크로 오븐과 컴퓨터 등 새 것들이 시간을 초월하여 같은 공간에서 살아서 숨쉬는 집이다.이민 초보자와 일찍 정착하여 살아온 사람들과의 현실 체감온도의 차이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내가 지금 살고있는 집을 장만하기까지 일년마다 이삿짐을 싸서 이사를 하며 옮겨다녔다. 남이 쓰던 가구를 장만하고 이사를 할 때는 버리고 떠나고, 뿌리를 잃고 표류하던 시절이 떠오른다.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1920~1930년대의 경제불황을 뉴-딜이라는 모토로 극복한 뉴욕 북부에 있는 200에이커의 넓은 땅에 세워진 루즈벨트 대통령의 생가는 국가 차원에서 역사기념물로 보존하고 있다.그가 태어난 침실과 유년기, 성장기를 보낸 침실, 가구와 소장품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5년 63세에 뇌일혈로 사망한 후 그의 생가의 장미밭에 아내와 같이 묻혀 있다.

그러나 업적을 남긴 위대한 대통령의 생가나 고색이 창연한 건축이나 부호들의 저택보다 이 평범하게 살아온 가족이 유지해 온 이 집이 나에게는 더욱 깊은 감동으로 남았다. 가족구성원이 해체되지 않고 구심점을 잃지 않고 오랜 세월을 지켜온 집이기 때문이다.집안 청소를 끝내고 나니 청량제를 마신 듯 머리가 맑아진다. 잠시 머물렀으나 가족과 함께 보낸 소중한 시간이 담긴 집이 아닌가? 100년 묵은 늙은 고목같이 모진 비바람과 시련을 견뎌낸 이 집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라며 그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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