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땡스기빙 데이

2006-11-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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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해마다 돌아오는 감사절(thanksgiving day)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감사절은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일년 중의 하루, 다시 말해서 감사를 일깨워주는 교육의 날인지도 모른다. 젊어서는 부모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되고, 중년이 되면 부부가 서로에게, 노인이 되면 하늘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감사절.

감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질에 대하여, 또 하나는 내적 관계에 대한 감사이다. 물질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생기는 선물 같은 것이 아니라 아침에 해가 뜨면 직장이나 작업장으로 나가 하루의 몫을 챙겨 열심히 일한 후 나의 노력에서 온 소득에 대하여 감사하는 감사이다. 내가 애를 써서 번 것이라고 해서 감사의 대상이 아닌 것이 아니다. 내가 수확한 소득으로 가족이 살아가고 내가 화평하게 살 수 있다는 것, 생존의 경쟁사회에서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가을 추수 다 끝내가는 늦가을의 빈 벌판에서 땡볕을 가려주던 모자를 공손히 벗어 손에 들고 어느 먼 곳에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머리 숙여 감사하는 밀레의 ‘만종’- 그림속의 부부는 봄, 여름, 가을, 등이 따갑도록 땡볕에 시달리며 일을 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말하기를 “내가 비지땀을 흘려 거둬들인 수확인데 감사할 일이 어디 있는가?” 라고 한다면 밀레의 ‘만종’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명작이 아니다. 그림 끝에 보이는 희미한 집을 보라. 가족이 거기에서 화평을 버무리며 이 부부를 기다리고 있으니 감사하고 감사하는 만종, ‘감사’라는 내용이 심금을 울리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지 그림의 솜씨가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는 내적관계에서 오는 감사다. 내가 세상에 살면서 헤어나기 힘든 고통에 허덕일 때, “왜 나를 태어나게 했나요!” 하면서 부모를 원망한다면 그 것은 천리를 부정하는 패륜이다. 해산의 고통을 너는 아느냐? 키우는 어려움을 너는 아느냐? 부모의 걱정을 너는 아느냐? 부모의 희생을 만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줄 안다면 감사하지 말라고 해도 감사를 할 것이다. 요즈음은 물질만능시대라선지 감사의 관계를 물질로 바꾸는 아이들이 많아진다. 그러니 부모는 날이 갈수록 원망 속에서 버려지는 존재가 되어간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그 관계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과 직장 동료들에게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 같은 따뜻한 관계에서, 또한 잊혀져 가는 옛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관계란 조직의 일원으로서 나를 허용한다는 말이고, 조직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명쾌하게 살기위한 사회조직의 요구인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들어 노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은 하늘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오래 살고 있다는 것은 하늘의 돌봄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내 뜻이 그러하여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탈 없이 나이를 많이 챙긴 노인들을 두고 천수를 누린다고 하지 않는가. 하늘에 감사할 줄 아는 노인들은 하늘의 마음을 읽는 지혜가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존경을 받고 나이가 많이 든 노인일수록 부러움을 산다. 나이란 이승과 점점 멀어지면서 저승과 가까워져 간다는 계산서가 아닌가.

땡스기빙 데이, 집집마다 이 날은 연례행사처럼 터키를 구워 식탁에 올려놓고 가족과 친척이 둘러앉아 감사절이란 절기를 즐긴다. 그러나 정작 감사해야 할 것을 찾지 못한 사람은 이 감사절에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지난 일년동안을 살면서 감사해야 할 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절의 절기를 지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기에 감사절은 따뜻한 마음으로 고개 숙여 얻은 물질에 감사하고 내적관계에 감사하고 하늘에 감사하고 또한 지난 일에 감사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교육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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